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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Feb 19. 2020

어떤 죽음, 어떤 삶: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크다. 어떤 슬픔은 다른 슬픔보다 전염성이 높다. 그러나 어떤 죽음도 다른 죽음과 달라질 수는 없다. 죽어가는 것과 죽은 것은 동일하다. 이것은 일종의 연속 상의 개념으로, 예컨대 서른 살인 내 입장에서는 죽은 어거스터스와 죽어가는 헤이즐이 크게 다르지 않다. 헤이즐은 서른까지 살 수 없을 테고 내 세상은 서른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헤이즐은 죽지 않았으나 죽은 사람인 셈이다. 

나는 뇌 호르몬의 문제로 10년 가까이 병을 앓아 왔다. 소아 우울증에서 시작한 병이었다. 헤이즐이 자신을 '수류탄'으로 묘사했을 때의 그 느낌을 나도 안다. 이따금 나는 (그리고 병원에서 만난 다른 환자들도) 죽음과 너무 밀접하게 붙어 있어서 생존 자체로 타인의 삶을 훼손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거스터스의 죽음에 대한 헤이즐의 반응은 이런 면에서 다정해서 위안이 되었다. 헤이즐은 죽음이 자신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남은 자신의 날이 영원할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어거스터스가 죽기 전 두려워했던 것은 잊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죽음에서 느꼈던 거의 유일한 공포이자 본질이다. 어거스터스의 선 장례식에 헤이즐이 들고 온 추모사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와 마지막 어거스터스의 편지야말로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가장 뚜렷하게 죽음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멈추는 것도, 앗아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삶만큼이나 뚜렷한 관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자신의 관성이 아니라 타인의 관성으로 움직일 뿐이다. 어거스터스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진자의 추이고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부딪히는 순간부터 이미 움직임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같은 주기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자 동시에 무한한 삶인 셈이다. 

작중 등장하는 소설 <장엄한 고뇌>에서 작가는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서 끊긴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마지막 문장은 '나도 좋아.'이다. 어거스터스와 헤이즐만의 '언제까지나.' 죽음으로 건너가도, 헤어지게 된다고 해도, 모든 슬픔과 무한한 영원을 견디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헤이즐은 언제까지나, 설령 죽음 앞이라고 해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도 좋아, 어거스터스. 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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