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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Feb 26. 2020

일용직 218번

시작은 간단했다. 핸드폰 소액 결제 비용이 밀렸다. 자해를 끊은 후로 내 새로운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지름'이었다. 나는 온갖 쓸모없는 것들을 샀다. 게임을 하며 게임 속 캐릭터에게 입히는 옷들, 아이디어스에서 파는 자잘한 소품들, 어디다 두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귀걸이들, 쓸모가 없으면 없을수록 스트레스가 풀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나처럼 전전두엽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은 충동에 약하다고 한다. 자해 충동, 소비 충동, 자살 충동이 전부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핸드폰 소액 결제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갔다. 핸드폰이 끊겼다. 그러고 나자 심각성이 느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곧 대출이라도 받아 새 지름을 시작할 것 같았다. 그때 동생이 제안했다.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가자고. 한 번 가면 7만 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했다. 공장 일이었다.

나는 공장 일에 나름의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쓸 데 없는, 속물적인 선망이었다. 유년기의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개천에 난 용이었고 순식간에 위로, 위로 올라가 사춘기 시절에는 제법 잘 사는 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리고 아버지가 그래 줄 수 있다는 이유로 3개월짜리 아르바이트를 한 번 했을 뿐 내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공장 일용직은 예전에 팔뚝질 하던 사람들의 수기를 받아 적으며 전해 들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알지 못했다. 내가 동생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일당 7만 원의 유혹보다도 그 수기에 적었던 체험을 직접 해보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첫날은 포장하는 일이 업무였다. OB 라인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반복 작업을 그렇게까지 못한다는 것을 일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계속 실수를 저질렀다. 끊임없이 현장의 캡틴에게 가서 라벨지를 붙이지 않고 그냥 택배를 보냈거나 라벨지를 찍지 않고 보냈거나 박스 체크를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8시부터 5시까지의 근무였는데, 중간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앉거나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내가 한 단위의 택배를 다 부치면 또 다른 단위의 택배가 내 앞으로 배달되어 왔다. <모던 타임즈>의 기계처럼 공장 안에서 우리는 같은 작업을 계속하고 하고 또 했다. 내게 일을 가르쳐 주신 분은 상용직 아저씨셨는데, 나름의 팁이 있으셨다. 라벨지는 대각선으로 붙어야 깔끔하고 테이프를 끊을 때는 약간 사선으로 힘을 주어야 잘 끊긴다. 나는 처음 10개까지는 마치 내가 막스의 이론에 나오는 노동자라도 된 듯이, 수기에 받아 적은 사람들의 동지라도 된 듯이 일을 했다. 약 기운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머리로 '나도 진짜 노동을 한다

.'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같잖은 생각이었는지. 포장한 박스 20개가 넘어가자 '노동에서 오는 기쁨 없이 살아가는 것은 즐거움이 없는 삶이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량한 자본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고생하지 않는 노동자도 없고 숭고한 노동도 이미 오래전에 죽어 피가 마른 단어였다. 나는 일당 7만 원에 팔려온 일용직 218번 노동자였고 사측은 내게 7만 원을 주는 대신 하루 종일 서서 일하기를 원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았다. '다들 앉아서 일하고 싶어 해요.'를 수기에서 몇 번이나 받아 적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막상 겪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현장의 노동자 중 누구도 앉아도 되는지, 의자는 있는지 물을 수 없었고, 잠시 쉬고 싶어도 손을 멈추면 안 됐다. 중간에 담배를 피울 시간도 없었다. 화장실만이 유일하게 허락됐다. 나는 계속 택배를 포장하며 이것이 2020년에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다. <모던 타임즈>가 나온 지 반백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노동 환경이 이렇단 말인가?

점심시간에 같은 일을 하는 이모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누구는 어디 공장에서 꽉 채워서 250만을 받았대. 뭐? 아니, 어디에서? 애 볼 시간은 있었대? 나와 비슷한 또래도 있었다. 이 지랄해서 놀러 가는 거 이제 그만해야지. 그들은 공장에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나처럼 처음 온 사람들, 어색하고 무섭고 충격받아 묵묵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빛으로 처음인 것을 알아봤다. 마치 대학생 새내기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내 노동의 대가에 대해 생각했다. 노동이 진정 신성하려거든 그에 걸맞은 대가가 나와야 할 텐데, 이 7만 원은 내 노동에 걸맞은 대가였을까? 내 반나절을 7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걸까? 동생에게 물어봤더니 동생은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공장 일은 못 해.'하고 대답했다. 나는 또 충격받았다. 내가 한 일은 사실 진짜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바쁜 일도 아니었으며 <모던 타임즈>든 막스 베버든 토마스 아퀴나스든 나랑은 전혀, 전혀 관련 없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체 같은 존재였다. 내 손으로 7만 원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조차 못했던 일용직인 218번.

공장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죽을 것처럼 힘들다.'였다. 왜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의 권리를 이야기하는지 한 번에 이해가 갔다. 그들의 작업 환경은 너무 험난하고, 힘들고, 그들의 시간을 빼앗은 대가로 지불하기에 몹시 부족하다.

나는 결국 핸드폰 비용을 어머니의 돈으로 갚았다. 그런데, 이제 아마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텐데, 돈을 수납하는 순간에 그 캐비닛이 생각났다. 218번의 번호가 붙은 캐비닛. 내 하루 수당 7만 원짜리 캐비닛. 어떤 사람들은 일용직으로 매일 그 캐비닛을 보는 삶을 살 텐데,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7만 원일 텐데, 그들을 보듬을 단체와 법은 어디에 있을까? 왜 그들은 아직도 서서 일하고 핸드폰도 보지 못하고 음악도 듣지 못하며 먼지 쌓인 공장에서 분진을 마시며 일 해야 할까.

나는 다만 이제 그들의 안위를 묻는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다. 내 캐비닛을 받아 썼을 다음 날의 일용직 218번에게 앉아서 일 할 권리, 음악 들을 권리, 원하는 대로 흡연실에 갈 권리를 주고 싶다. 그의 반나절이 7만 원어치의 값을 하기를 바란다. 내가 느낀 초라한 보람이 아니라, 당당하고 지치지 않는 보람을 주고 싶다. 언젠가는 일용직 218번들이 반나절을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오게끔 만들고 싶다.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 나아가고 싶다. 나의 일용직 알바는 대실패였지만, 그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더는 하지 않으면 좋겠다. 돈을 더 주고 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게 해 준다면 누구도 <모던 타임즈>고 나발이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용할 구절이 없는 공장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나아갈 수 있기를,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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