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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Mar 14. 2020

먹고, 씻어라

누구나 우울할 때가 있다. 직접적인 이유든 간접적인 이유 든 간에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늘 이것을 추천하고 싶다. 먹고 씻어라.
우울한 일이 생겨 기분이 나빠졌다. 그 일이 당신을 충분히 괴롭히고 지나갔다면, 이제 먹고 씻어라. 본질적인 우울이 사라지지 않아 자해를 했다. 다 했다면, 충분한 감정의 소비가 끝났다면, 이제 먹고 씻어라. 어쩌면 당신은 여기서 그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 실패해서 자살 미수로 남게 되어 가족들을 마주하게 됐다면, 오열과 분노와 인정과 사과와 용서 같은 순간들이 지나갔다면, 그렇다면 이제 먹고 씻어라. 

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할까? 왜냐면 바로 저런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못한 것은 생각보다 치명적인 고통이 아니다. 우울은 우울일 뿐이고 당신은 어쩌면 돈이 많아도 얼굴이 예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어도 매일 우울감에 자살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괜찮다. 원래 우울은 한 번 찾아오면 계속 드나드는 손님 같은 것이다. 행복은 국지적이다. 스콜처럼 아주 잠깐만 쏟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행복을 더 오래 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8살 때 어른에게 '깊은 우울을 가진 사람은 어려도 얼굴에 다 티가 난다, 너를 보면 딱 알 수 있다. 너는 지금 아주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8살 때도 소아 우울증이 있었던 불행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치열하게 행복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얼굴에서 우울과 죽음 대신 행복과 기쁨을 읽을 수 있을지,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한지 찾아 헤맸다. 내가 결국 찾아낸 방법이 있다. 바로 방법이 없다는 방법이다. 어떤 행복도 평생 가지는 않는다. '끝'은 모든 것에 존재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어떤 불행도 평생 가지는 않는다. 당신은 아마 좋아하는 것을 먹고 씻는 30분의 순간만큼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바흐를 틀어두면 1시간도 행복할 수 있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2시간도,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면 4시간도 행복할 수 있다. 이 행복은 잠시 당신을 찾아와 삶을 밝게 비출 것이고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촛불과 비슷하다. 누가 조금의 입김이라도 불거나 심지가 다 타면 저절로 꺼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우울에 관통당한다. 통째로 꿰뚫리고 죽어간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당신이 대면한 고통에 시달리고 울고 잃고 죽는 걸 시도하고 지쳐서 침대에서 한 걸음도 못 일어날 것 같아질 때, 바로 그때 먹고 씻어라. 딱 30분의 행복을 당신에게 주도록 하자. 거기서 시작해서 점점 행복해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차피 그럴 수 없다. 우울에 삼켜진 사람들은 대다수의 일상을 우울하는 데에 쓴다. 어쩔 수 없는 관성 같은 것이다. 말라죽은 나무에 그래도 물을 쏟아보는 정성으로 당신을 먹이고 씻겨라.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설령 기분이 잠시 좋아지더라도 곧 나빠지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라. 먹고 씻고 용기가 난다면 다른 행동도 해보아라. 굳이 우울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우울하지 말아야지'와 '행복해야지'는 동의어가 아니다. 행복은 결코 우울의 반대가 아니다. 행복은 우리를 우울에서 끄집어내어 영원한 기쁨의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오히려 우리가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행복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때때로 용기까지 필요한 순간도 있다. 침대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겨낼 용기, 마시고 싶은 술을 참아내는 용기, 자해를 참는 용기, 자살을 하기 전 머뭇거리는 용기들이.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다. 우선 당신의 우울을 잠시만 포기해보라. 나에게도 이것은 한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용기를 짜내 먹고 씻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자해를 멈추고 자살을 그만두었다. 그럼 지금 나는 우울하지 않은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마 8살 때 만났던 그 선생님은 나를 보며 또 같은 말을 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원래 우울한 사람이 맞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우울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나의 용기는 모두 국지적 행복에서 시작해 차츰 웅덩이를 만들고 호수가 될 때까지 커져갔다. 나는 여전히 우울의 골짜기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우울하게 사는 것은 심각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좀 죽을 듯이 산다고 해도 별 일 없다. 
그저 이 용기를 기억하라. 먹고 씻어라. 그리고 다음 일을 생각하라. 만약 먹고 씻었는데도 침대에 눕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은 꼭 해야 한다.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먹고 씻어야 한다. 당신의 작은 용기는 당신을 우울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할 것이고, 당신은 우울해도, 절망스럽고 화나고 죽고 싶어도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그 첫 번째 용기에 달려있다. 이제 가서 먹고, 씻어라. 그리고 한 번 행복해져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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