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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an 30. 2022

이토록 섬세한 영원 <이터널스>

2021, 클로이 자오

<이터널스>는'최상위포식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 행성의 지배종, 먹이사슬 그 끝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종족적 측면에서 영생하는 이들이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터널스'는 불멸을 의미한다. 불멸자가 최상위포위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은 인상 깊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홀로코스트를 만들어 왔는가. 인간에서 인간에게로, 동물에게로, 식물에게로, 나아가 한 행성의 새명체 전체를 볼 때도 인간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랫동안 최상위포식자로 군림하던 인간에게 '멸종'은 굉장히 무의미한 단어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이터널스>에서 인간들은 문득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최상위포식자의 자리에서조차 미끄러진다. 그렇지만 이 탄생의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순환 위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지렁이가 지렁이의 삶을 사는 것처럼. 태어나 흙을 먹고 자라며 땅을 기름지게 하다가 죽어서 하나의 사체가 되어 썩어들 듯이, 이들도 그저 행성 안에서 태어나 다른 은하계를 창조하며 순환의 굴레를 계속 이어간다. 이것은 악이거나 선으로 골라서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이다. 트롤리 딜레마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쪽을 고르든, 누군가는 트롤리에 치이게 되어 있다. 

이카루스는 절대적으로 순환을 믿는다. 리더였던 에이젝을 살해할 정도로 그의 신념은 대단하다. 그러나 결국 이카루스를 태워 죽인 것은 스스로의 오만, 사랑 앞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오만 때문이었다. <이터널스>에서는 이러한 미묘한 대비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자신의 기억을 잃어 날뛰게 되는 테나도 그렇다. 테나는 기억을 지우려는 에이젝에게 '자신으로 있게 해 달라'며 애원한다. 길가메시가 테나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기억해'였다. 테나가 전투 중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된 키워드 역시 '기억해'이다. 많은 학자들이 기억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중심적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하나로 묶여 있으며, 이 끈은 매우 질기고 단단하여 하나만 골라 자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자에게는 현재가 존재할 수 없으며 현재가 없다면 미래 또한 오지 않는다. 기억은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이다. 영원불멸한 존재일수록 더욱더 그럴 것이다. 기억이란 결국 자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에이젝은 기억을 지워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기억을 잃은 테나가 기억을 잃기 전 테나로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같은 그릇 안에 다른 물을 담는 셈이니까. 내 삶과 내가 동일성을 잃는다면 길을 헤맬 수밖에 없다. 

<이터널스>는 기본적으로 창조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조 설화라고 보아도 되겠다. 흥미로운 점은 지구 창조설이 아니라, 셀레스티얼의 창조였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는 셀레스티얼의 입장으로 치자면 다큐멘터리나 다름이 없다. 우리도 종종 다른 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이 공포로 여겨진 적은 없었다.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최상위포식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에는 이유가 있다. 셀레스티얼들은 '세계'를 창조한다고 한다. 우주를 창조하는 그들의 탄생을 막는 것은 사실 다른 별, 다른 은하계의 탄생을 막은 일이 된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또 트롤리 딜레마를 꺼내오지 않을 수 없다. 세르시가 지적하듯 이 탄생은 인간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레버를 돌리면 하나의 셀레스티얼은 살 수 있지만 수 억의 인간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인간의 행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최상위포식자로 군림하면서 무엇을 했는가? 타 종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멈추었는가? 전쟁이 사라졌는가? 한 셀레스티얼은 한 세계를 만든다. 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카루스는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셀레스티얼의 탄생은 한 세계의 순환이고, 자연의 흐름이니까. 세르시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존재의 고통이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셀레스티얼이라고 해도, 한 우주를 창조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자들이라고 해도, 개미 한 마리조차도 그들 때문에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 숭고한 자연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인간과 개미 한 마리 정도의 차이가 있었음도 세르시는 인간을 선택했다. 세르시는 트롤리를 넘어뜨리거나 길을 꼬지는 못했지만, 레버를 돌릴 용기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르시는 '인간적'이다. 스스로 날아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이카루스는 결국 끝내 레버를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인간적'이다. 이 트롤리 딜레마를 두고 편을 가르고 다투는 순간, 그들은 이미 자연의 순환이나 셀레스티얼의 탄생과 같은 이야기를 떠나, 한 종의 멸망과 홀로코스트, 탄생과 죽음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구를 떠나기 전에 마카리와 드루이그는 '진실이 그들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을 남긴다. 동의한다. 전 세계의 인간들이 모두 이 트롤리 딜레마에 빠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생존했으나, 덕분에 한 세계를 죽였다. (세계가 탄생도 하기 전에.) 레버를 어느 쪽으로 당겨야 할까? 트롤리 딜레마에 옳은 답이란 존재할까?

종내 그들이 세계의 탄생을 막아버린 다음, 남은 힘은 스프라이트를 인간으로 만드는 데 쓰이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경험한다. 싫든 좋든 우리에게는 늘 끝이 있다. 세르시가 가지고 있던 유니마인드의 힘, 물질을 물질로 전환하는 창조의 힘으로 세르시는 스프라이트에게 죽음을 선물해준다. 

이토록 섬세하고, 이토록 아이러니한 역설들이 너무나 좋았다. 영원하지만 결코 완벽하지 않은 삶들, 결국 끝내 사랑하여 죽이지 못하고 사랑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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