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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ul 30. 2021

재앙이 시작된 곳 : 모노노케 히메

2003, 미야자키 하야오

인간이 자연을 동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의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근절된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은 뿌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신이 아니다. 자연은 그냥 자연이다. 인간은 싫든 좋든 이미 자연 속에 살고 있다. 굳이 덧붙여 강조하자면, 자연을 부수며 그 속에 살고 있다. 때문에 자연을 신격화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관객이 맨 처음 맞이할 자연의 분노를 재앙신이 된 터주 멧돼지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인간의 무기에 맞아 훼손된 자연이다. 이 멧돼지는 죽기 전 인간인 너희들은 자연의 분노를 모른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인간과 자연은 서로 나누어져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에 대답하기 위해 산과 아시타카를 보여준다. 산은 자연 속에서 자라난 인간, 아시타카는 자연을 존중할 줄 아는 인간이다. 결말부 둘의 관계에서 더 명확한 답이 나온다. 산이 굳이 들개 사이를 벗어나 아시타카와, 인간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아시타카는 괜찮다고 한다. 자신이 종종 산에게 가겠다고 말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시하는 이상향의 모습은 이러한 조화였을 것이다.

이런 상생은 사슴신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사슴신은 죽음과 삶, 양쪽의 신이다. 때로는 모든 것들을 죽일 수도 있고 때로는 살릴 수도 있다. 그는 죽음과 삶의 신이며 동시에 순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슴신이 걷는 자리마다 삶이 요동치다 죽어간다. 이런 사슴신을 ‘사냥’하려는 무리와 지키려는 산, 그리고 둘 사이에서 힘겹게 징검다리가 되려고 노력하는 아시타카의 모습이 <모노노케 히메>를 꿰뚫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마을이 이웃 사무라이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슴신 사냥을 멈추지 않는 에보시다. 에보시는 ‘인류’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사슴신을 쫓아 숲 속으로 들어간다. 에보시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마을의 안전과 풍요였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에보시도 다른 무리들처럼 사슴신을 쏘고 싶어한다. 그까짓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잡는지 보여주겠다는 호기에 찬 발언도 빼먹지 않고. 에보시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등장하는 가장 큰 악인일 것이다. 사람을 돌보고, 사람을 위한 집을 짓고, 사람을 구조하지만, 그는 계곡에 떨어진 소몰이들을 두고 간다. 습격 받은 여자들이 보낸 전갈을 듣고도 사냥을 계속한다.

에보시는 객관적이고, 효율적이며, 타인을 희생시키는 만큼 자신의 희생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에보시는 악인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보시는 선량한, 대범한, 이성적인 인간이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신을 쏘아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변명을 가져다 붙여도 에보시는 악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에보시를 그냥 악인으로 읽어내는 것에 반대하는 듯 보인다. 그는 에보시가 마을을 위해 해낸 것들을 조명한다. 에보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마을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늙은 문둥병 환자가 제발 에보시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는 모습도 나온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런 모습들을 보며 에보시를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산은 다르다. 산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되 자연의 소속이다. 산은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공격도 강행한다. 그러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에보시(인간)는 자연(산)에게 이토록 미움받고 있는데 대체 악역이란 말인가, 선역이란 말인가.

나는 차마 악역의 껍질을 완전히 두르지 못한 인간이 바로 에보시라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련의 마을 사람들 반응을 넣으며 에보시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다. 그는 명확한 악역으로 에보시를 그려내는 동시에 명확한 인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자연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오만함을 가진 인간을 말이다.

그래서 에보시는 사슴신의 머리를 쏜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자연과 상생하기를 거부한다면 양쪽 다 죽음의 순환을 돌게 될 뿐이다. 사슴신이 가져온 죽음처럼.

재앙을 끝낸 것은 결국 에보시가 아니라 산과 아시타카였다. 아시타카는 ‘인간의 손으로 머리를 돌려줘야’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머리를 들어 올린 두 쌍의 손 모두 인간의 것이라고 이야기한 셈이 된다. 산의 손도, 아시타카의 손도, 사슴신의 머리를 쏜 에보시의 손처럼 인간의 손이다.

재앙이  차례 휩쓸고 지나가며 인간의 터전은 모조리 부서졌다. 이것은 마치 등가교환 같다. 자연을 훼손하고 불태우고 죽였던 만큼 돌려받는 것이다. 마을의 ‘꺼지지 않아야 불은 꺼지고 말았다. 불은 오래전부터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중요한 상징  하나라는  생각하면, 불이 꺼진 인간들, 그러니까 에보시는 오히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자연을 죽이지 않고 상생하는 시작을. 아시타카가 이끌고 그들이 따를 것이다. 산은 계속해서 들개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럴  있어서  애니메이션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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