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Feb 12. 2023

슬램 덩크 ; 한 줄짜리 삶에 대해서

1.

저는 무엇을 붙잡고 사는 데 익숙합니다. 한때 제 유서의 첫 줄은 '아직도 살아있어 죄송합니다.'였습니다. 저의 삶은 비용이 꽤 드는 삶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지금도 종종 사라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꾸준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갖게끔 합니다. 작중에서 송태섭은 그것이 농구였다고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300g의 작은 고양이였습니다.

유서의 첫 줄을 지우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들었어요. 그 고양이는 저의 실수로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사랑, 자존감, 자기애, 가족애, 누군가 나를 보듬어 줄 타인의 존재를 모두 그 애에게 몰아넣고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삶이 낙하하는 기분을 아시나요. 저는 송태섭처럼 일어서지 못했어요. 정신 병동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될 거 같은 날이 오면 또 유서를 썼죠.


2.

엄마에게는 영원히 20대인 동생이 있습니다. 저의 작은 외삼촌은 20대 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조현병인 딸이 있습니다. 저는 매년 1회 이상의 자살 시도를 하는 자살 고위험군 환자입니다.

여전히 제 유서의 첫 줄은 '아직도 살아있어서 미안해.'입니다.


3.

왜 이 영화는 송태섭을 메인 캐릭터로 골랐을까요? 저는 유서를 받고도 앞서 나갈 수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유지를 잇는다는 것, 형이 원하던 곳에 가겠다는 것은 따지자면 살아있을 거라는, 무엇보다 생생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제 잘못에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죽기 전까지 살아가야만, 그 애가 보지 못한 계절을 다 보고 겪고 평생 가슴 아파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송태섭은 저와 다릅니다. 멈추지 않았어요. '형이 아니라서 죄송하다'라는 말 역시 유서에 들어가는 말이 아닙니다. 송태섭이 그 문장에 꾹꾹 눌러쓴 삶을 보세요. 형이 없어도, 어머니의 마음이 완전히 닫혀버렸어도 그래도 농구를 할 것이라는, 그것은 결국 죄송하지만 저는 살아야겠다는 몸부림입니다.


4.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송태섭의 삶과 맞추어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너질 거 같아도, 무너졌어도, 휩쓸렸어도, 코트에서 달리는 순간만큼은 송태섭은 누구보다 더 송태섭 자신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송태섭에게 북산의 승리는 꿈을 이룬 일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정의해 버리는 일입니다. 나는 북산의 송태섭이고, 죽은 형 대신 살아가는 소년이며, 언제나 이 마지막 경기를 위해 사활을 걸고 있었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송태섭은 '형을 대신해 죽지 못해 죄송하다'는 노트를 구길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 노트를 어머니에게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수백 배로 힘든 일입니다.

송태섭의 어머니도 결국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나타나죠. 송태섭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몇 명의 수비를 뚫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굳이 송태섭의 어머니가 그 장면을 봐야만 했던 이유는 송태섭이 포기한 한 줄, 형을 대신에 살아남아 죄송하다는 그 한 줄 때문입니다. 송태섭이 결국 그들을 뚫고 나갈 때 그 문장은 진정 사라져 없어지는 문장이 됩니다.

송태섭의 모친은 그제야 형이 아닌 송태섭을 봅니다. 송태섭은 그제야 형의 뒤에서 벗어나 어머니에게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북산은 승리합니다.


5.

저는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 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송태섭이 해변에서 마침내 형의 아대를 어머니에게 건넸을 때, 송태섭의 이야기는 비로소 1막을 내리게 됩니다. 해피 엔딩이지요. 단순히 승리해서가 아닙니다. 작품 내내 곳곳에서 보여지는 열등감, 부재감, 폭력, 압박감, 북산의 승리는 이런 것들의 토대를 모두 끌어안아버리고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관객은 북산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갖가지 리스크를 쥐고도 승리하는 기적을 보여주기까지 하니까요.


6.

다시 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저는 유서를 더는 쓰지 않아요. 자살 시도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남겨두는 것이 많을수록 가족들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저도 자살 시도가 없는 삶을 바랍니다. 그래서 타임라인 내내, 결과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봤어요.

저는 무언가에 목숨을 맡긴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어요. 다만 무너졌다가도 일어난 사람들은 많지 않죠. 북산은 이 흔치 않은 스토리를 개개인이 가진, 뻔한데 감정적으로 뻔하지 않는 팀입니다.

며칠 전에 그 애의 잿가루를 뿌리러 캐나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니면 다시 몽골이어도 좋고요.

몽골에 갔을 때, 소수 민족의 언어로 글을 써주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삶은 회전한다'라고 쓰인 종이를 받아 왔어요. 제 고양이를 위한 문장이었습니다.


7.

저에게는 다시 두 마리의 고양이가 생겼어요. 저는 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책임질 거지만 이 이야기를 해피 엔딩으로 끝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시도 해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쓰던 문장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기적이 생기길 바라면서요. 그렇게 비로소 회전을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꿈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