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외할아버지를 보내며 - 인간다운 죽음에 관하여

2024.12.15 (일)

by JSJ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차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이제 막 자정을 넘긴 때였다.

연말을 맞아 모처럼 회사에 출근해 회사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저녁 회식도 하며 팀 단합을 했던 날, 공교롭게도 영화관으로 향하던 시각에,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놀 준비를 하던 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새벽에 급하게 다시 기차를 끊고, 경조휴가를 올리고 눈을 붙인 후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2시를 갓 넘겨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1층 로비에서 3층에 빈소가 마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간단하게 정비를 한 후, 빈소로 향했는데 친척들이 아무도 없었다. 의아한 찰나 상주해 있는 직원에게서 입관이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듣고 입관실 위치를 물어보니 이제 막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던 1층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서둘러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고 내려가 입관실 입구로 향했는데, 친척들이 입관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미 입관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또 공교롭게도 우리가 1층 로비에서 짐 정리도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하며 한 숨 돌리고 있던 때에 바로 건너 편에서는 외할아버지가 입관 중이었다고 한다.

건강이 악화되셔서 얼마 못 사실 것 같다는 얘기를 어느정도 들었던 터라 여태까지는 덤덤해하셨던 어머니지만, 그 마지막을 간발의 차로 놓친 억울함에 많이 서럽게 우셨다. 그리고 빈소로 올라가 영정을 마주하고 다시 한참을 우셨다.


모든 일은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 뒤로 더 깊은 슬픔에 닿지는 않으셨고, 그 덕에 끝없이 슬프고 비관적인 장례식이 될 수도, 기쁜 마음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 장례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은 후자가 되었다.

친척들의 인맥이 넓은 덕에 많은 사람들이 조문해주어 식장은 항상 붐볐고, 외할아버지를 포함해 우리 가족과 친척들 대부분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덕에 많은 교인들(그분들끼리의 호칭으로는 형제들)이 찾아와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는 메시지를 담은 예배와 기도로 위로해 주었다. 친척들이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덕에 조문객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웃으며 발인을 준비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잔디장으로 모셔졌다.

잔디장이란 화장을 한 뒤 땅에 묻고 그 위에 잔디를 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땅에 묻는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맨 땅에 묻었다. 즉 수골함 째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수골함을 열고 재가 된 할아버지를 맨 땅의 구덩이에 부은 다음, 그 위를 흙으로 덮는 것이었다. 원래는 흙으로 다 덮은 뒤 잔디도 심어야 하지만, 겨울이라 땅도 얼고 잔디도 자라지 못하는 환경이라 현재로썬 흙으로만 덮는 선에서 끝났다.


장례는 고인을 기억하고 존중하기 위해 표현되는 행위로써 보통 영화나 현실에서는 관째 조심히 묻거나 납골당에 단지 째 모시곤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처음 본 잔디장은 조심스럽기보다는 수골함에서 재를 탈탈 털어내는 다소 거친 방식에서 한 번, 관이나 단지같은 어떤 가림막도 없이 흙과 곧장 섞여 양분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두 번 놀랐다.


잔디장이 진행되기 전 마지막 기도에서 우리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있었던 갈등과 불화를 모두 끊어내고 외할아버지가 진정한 안식에 들기를 기도했다.

내세의 실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의 개념이 생겨난 목적이 중요하다. 내세를 믿음으로써 유족들은 슬픔을 딛고 아름다운 이별을 할 준비, 다시 각자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갈 준비를 하는 데 큰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났을 때 우리는 그 준비를 모두 마쳤다.


육체는 한 줌 흙으로, 영혼은 천국에 닿은 날. 공교롭게도 이는 모처럼 대가족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차를 마시며 기쁨으로 웃었으며,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며 사랑으로 헤어졌다.




내 기억 속 외할아버지는 한평생 근원을 탐구하는 철학적인 분이셨다. 신문을 매일 읽고 책을 가까이하며 성경 중에서도 잠언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가끔 내게도 인문학과 관련한 책들을 추천해주시며 생각할 거리를 주시곤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오늘, 외할아버지는 내게 당신의 장례식을 회고하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마지막 생각할 거리를 전해주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란 말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만약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양분이 되는 것 만으로 족한다면, 굳이 나라는 사람은 장례라는 절차를 통해 죽어서도 기릴 필요가 없다. 그것은 동물의 죽음이며, 이미 이 땅의 수많은 생명들이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 미래에 맞이할 나라는 한 사람의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다. 불화와 갈등을 끊어내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도우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훗날 돌이켜 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이러한 메시지를 한 사람에게라도 남길 수 있다면 이것은 인간다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나는 쉽게 누군가를 미워하고, 나를 우선하며, 여유로운 일상에 안주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 사람 또한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의 남은 인생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때 더 오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답을 내고 보니 공교롭게도 기독교에서 전하는 본질적인 메시지와도 많이 닮은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매 순간을 진심을 다해 치열하게 살자. 그리고 나를 잃지 말자. 스스로를 지켰을 때 그 영향력은 더 분명해지므로.

먼 훗날 천국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이것이 당신께 기쁨을 줄 답이 되길 바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Make My Day, 하루를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