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서른 즈음에

2025.01.28 (화)

by JSJ

간병하던 주간이었다.

소리소문 없이 문 앞에 택배를 두고 사라지는 작금의 택배기사처럼, 도로와 인도에 산재한 염화칼슘에 장렬히 전사한 선발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때로는 창문에 부딪히기도 하며 잿빛 하늘에서부터 아등바등 대다 간신히 도로나 인도를 피해 지상으로 내려와서는, 이미 수없이 많이 쌓인 새햐안 택배들 위에 스스로를 한 겹 더 쌓는다.

첩보작전처럼 진행되는 수백 수천 개의 배송 과정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아버지께서 보호자를 하시겠다고 등록까지 했기도 하거니와, 지금 내가 있음으로써 도움이 되는 것도 없기에 병원을 나와 집에 잠깐 들른 후 운동이나 하러 헬스장에 갔다.



러닝머신 위에 올라 워밍업으로 걸으면서 창 밖의 아파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옛날에 지은 아파트라 복도식에 도색은 살색에 가까운 색인데, 세월로 인해 때가 타서 어둑어둑한 자국이 많은 아파트였다. 현대 사회에서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지금의 내 심정과 많이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잿빛에 가까운 배경을 심드렁하게 훑던 가운데, 문득 하얀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사람이다. 집 문 앞에, 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난간의 위치에, 눈집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손으로 꾹꾹 눌러 만든 작은 눈사람이 올려져 있었다.


문을 나설 때마다, 집으로 귀가할 때마다 조그만 눈사람이 맞이해 준다니. 눈이 내리기 무섭게 염화칼슘이란 인공 눈을 아스팔트를 덮어버릴 정도로 뿌려대는 냉정한 사회에서 눈사람을 만들 생각을 하고, 아파트 아래에서 손으로 빚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집 앞 잘 보이는 난간의 위치에 놓아두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그래도 아직 세상에는 순수함이 남아있다는 것에 다소 감격스러웠다. 헬스장 창 너머의 따스함과 병원 창 너머의 잿빛 풍경이 뒤섞인 심정으로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나머지 운동을 하고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 낭만적인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의 감격은 너무 속단했다는 듯 눈집게로 만든 눈오리들부터 손으로 빚은 작은 눈사람, 골반 높이까지 오는 꽤나 큰 눈사람, 어디서 찾았는지 나뭇가지와 돌로 코와 눈과 손이 달린 눈사람까지 유별나게도 모퉁이 모퉁이마다 각양각색의 눈사람들로 가득했다. 게릴라 조각 전시회가 무료로 온 동네에서 열리고 있었다.


너무 추운 날씨라 마냥 구경하다간 나도 이들 중 하나로 전시될 듯하여, 내일이면 적어도 3분의 1은 사라질 이 전시회의 풍경을 카메라로, 눈으로 서둘러 담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아직 동심이 남아있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나는 이러한 것에 감격하는 나의 모습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운전하기 매우 힘든 것도 사실이고, 발이 묶이는 것도 사실이다. 지상에 차를 두었다면 얼지 않기 위해 와이퍼를 올리고, 눈을 치우고, 덮개를 깔던지 하는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서는 자동차 보닛 위에 쌓인 눈을 모아 눈덩이를 만들며 귀찮음이 아니라 행복을 찾는 모습이 보인다.

염화칼슘 탓이든 자연적으로 녹는 탓이든, 아스팔트의 때가 타고 거뭇거뭇해지다 녹아내리다 블랙아이스가 되는 눈을 하얀 쓰레기로 부르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까? 장갑이 다 젖도록 눈을 뭉치던 어릴 적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나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가는 기억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여전히 눈을 보면 설레고 감격하는 것은 아직 마음 한켠에 어린아이를 담은 성숙한 어른이 있는 것인가, 몸만 커버린 어른이 있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로 불릴 확률이 높은 나이가 되었기에, 이제는 눈이 오면 마냥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창 밖을 보던 것처럼.



어쩌면 어제 내린 눈이 이번 겨울의 마지막 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T가 94%를 향해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감상에 젖어본다. 아마 다음 주에 잠시 내리는 비를 끝으로 무턱대고 달려올 봄을 예상하지 못한 목련과 개나리와 진달래와 벚꽃이 또 작년처럼 허둥지둥 맞이하겠지.


또 한 번의 겨울이 가고, 애꿎은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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