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1 (수)
오전 운동을 하고 샤워실에서 나오니 머리가 다소 벗겨진 할아버지, 아니 요즘 시대에는 할아버지로 부르면 실례일 나이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거울 앞에서 선풍기를 켠 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마당발에 어딘가모를 카리스마가 있는 다소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였는데, 평소 다른 아저씨들이 유독 이 아저씨에게만 먼저 인사를 먼저 건네기도 하거니와, 한번은 내가 사용하던 기구 옆에서 잠깐 쉬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달려와 한 세트만 하겠다고 하고는 정말 한 세트만 쓰고 다른 기구로 휙 가버리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로 꽤나 강한 인상을 받은 탓에 직접 말 한 마디 섞어본 적은 없어도 내적 친밀감은 꽤나 높았다.
그 옆에서 머리를 같이 말리고 옷을 입으려는데 이번에는 이제 막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타이트하게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탈의실로 들어왔다. 이 친구도 말 한 마디 섞어본 적은 없었으나 대개 내가 탈의실에서 짐을 싸고 있을 시간이면 항상 비슷한 차림으로 탈의실에 들어오곤 했기에 은근한 내적 친밀감이 있었다.
나처럼 내적 친밀감을 계기로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까지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젊은 친구 또한 아저씨를 보면 항상 인사를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 같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대화가 길었다.
"어으, 춥네요."
"뭐, 추워? 야 임마 춥기는! 나는.."
"에이 아저씨는, 방금 씻고 나오셨으니까 그렇죠! 따뜻한 물로 씻으면 당연히 안춥죠~"
당황한 듯 순간 말을 잇지 못하던 아저씨는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새로운 근거를 댔다.
"아, 아저씨 찬물 샤워했어! 진짜라니까? 몸 만져 봐 차갑잖아!"
하지만 젊은 친구는 관찰력이 예리했다.
"선풍기 쐬셔서 그렇겠죠! 여태 쐬셨잖아요."
"허! 참나. 아저씨를 무슨..."
말문이 막혀버린 아저씨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서로 언제 대화를 나눴냐는 듯, 서로 나란히 거울 앞에 서서 각자의 할 일을 했다.
갑자기 생겨버린 정적으로 하마터면 나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수습하여 마음 속으로 말아넣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다행히 장난 한 스푼으로 지어진 미소를 들키기 전에 젊은 친구가 탈의실을 나서며 아저씨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어 그래. 운동 열심히 하고~!"
티격태격 하면서도 끝은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이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그들에게서 느껴진 따뜻함 한 스푼에 옅어지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사람의 뇌는 은근히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가짜 웃음과 진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즉, 근육 운동하듯 아무 생각 없이 미소를 지어도 뇌는 진짜로 웃은 것과 똑같이 받아들여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짜 웃음에는 부작용이 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정말 기분 좋을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주 가짜 웃음을 짓다보면 문득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하며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 곧 출근을 앞둔 비몽사몽한 아침에 엊그제 본 가짜 웃음에 관한 기사를 떠올리며 웃어보거나, 전날 밤 가까운 사람과 싸웠다면 더더욱.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짜로 웃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웃음이 나에게 찾아왔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오늘처럼 노력 없이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모래알과 같이 찾아오길 소망하며, 이렇게 얻은 웃음을 탈의실에 두고 나오기 싫어 서둘러 젊은 친구의 뒤를 따라 나섰다.
하늘이 참 맑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