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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정 Nov 07. 2017

이 세상 모든 덕후들을 응원한다

퇴사일기, 열세 번째 : 소리꾼 한승석으로 시작된 덕후론

한승석x정재일 콘서트 포스터

어느 날 선배와 소리꾼 한승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한승석은 대학 동아리 활동을 통해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 ‘장길산’의 엄청난 감명을 받은 그는 최근 ‘장길산’에서 영감을 얻은 신곡을 발표했다. 선배는 그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있었고, 나와 선배는 어린 시절 ‘장길산’을 읽으려다가 10권이라 포기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한승석이란 ‘장길산’ 덕후가 제대로 해냈다고 웃었다.


선배 “진짜 덕후도 덕후도 서울대 법대생이 판소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뭐라고 했을까?”

나 “그래도 해냈네요”

선배 “그 정도면 뭘 해도 해냈을 듯”

나 “덕후들이 제일 부러워요. 저는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밀고 나갈, 열정을 다할 게 없는데..”     


퇴사 이후 나의 화두는 줄곧 잃어버린 꿈과 열정을 찾는 것이다.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꿈과 열정 찾기가 서른을 앞둔 지금에야 시작된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하고 싶어서 미치게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아름답다.      


열정을 다하려고 해도 나의 온 마음이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계가 있다. 연예부 기자 시절, 수많은 덕후들을 봤다. 밤을 새우며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을 스트리밍하고, 영상을 본다. 투표도 빠짐없이 참여하며 좋아하는 가수의 1위 만들기에 ‘총공’을 다한다. 가수를 위해 대기업 버금가는 전략기획서를 만드는 사람도 봤다. 한때 

‘팬덤의 세계’ 시리즈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팬아터, 팬픽, 홈마스터 등을 만나 뭔가에 빠진 사람들의 능력치를 눈으로 봤다. 주변에만 해도 덕후 기질로 자신의 일터에서 빛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생계나 일상에 지장을 주는 경우에는 부작용도 많지만, 무언가에 자신을 온전히 몰입한다는 그 경험 자체가 나는 너무 부러웠다. 그 누가 뭐래도 빠진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덕후 용어 중에 ‘일코’가 있다. 이는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로 주변 사람들에 덕질하는 것을 숨기고 일반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이다. 분명 덕질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생긴 용어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라고, 그만큼 남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이 많은 나라다. 한국에서 꿈과 열정을 찾는 건, 남들이 인정하는 그럴듯한 일이 아니면 시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까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덕후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돈과 시간은 둘째 치고,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도무지 마음이 움직일 만한 원동력이 없다. 기자 시절 나는 스스로를 ‘생계형 덕후’라고 불렀다. 아이돌에 대한 심도 깊은 기사를 나름대로 쓰면서 주변에서 나를 덕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누군가의 팬은 맞아도 깊이 파는 덕후는 아니었다. 덕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만큼 내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뿌듯했다. 때로는 사심으로 일을 한다는 의미로 변질돼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덕후 덕분에 색깔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덕후들을 응원한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들은 영감을 주고 열정을 알게 해 준 존재들이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의 구절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처럼 덕후들은 어떤 무엇에 대해 뜨거운 사람들이다.      


덕후들을 부러워하며 지금의 내 모습에 아쉬워할 때, 한승석에 대해 같이 이야기한 선배는 말했다. “지금 캐나다 40일, 다들 부러워하고 대단하다고 하고 있어.” (당시 캐나다에서 40일 동안 체류했다.) 정말 고마운 말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건, 내가 갖지 못한 걸 남이 가지고 있을 때일 테다. 비록 내가 열정적인 덕후는 되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삶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에 대한 덕후가 먼저 되야겠다. 


P.S. 여담으로 한승석X정재일 새 앨범에서 '장길산'으로 바탕으로 한 곡은 '정(情)으로 지은 세상'과 '저 물결 끝내 바다에'다. '정으로 지은 세상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코끝이 찡해진다. 


캐나다 밴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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