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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공감

by 오순

클래식을 들으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마치 영어 자막으로 영화를 본 것 같다.

악단의 연주를 들으면 귀가 아프다. 귀에 대고 심벌즈를 치는 느낌이다.

오페라를 관람하면 모르는 언어들이 빠르게 정신없이 쏟아진다.

어디서 박수를 쳐서 호응해 주어야 하는지 공감보다는 눈치로 반응한다.


마당놀이를 보고 있으면 우리 조상들이 삶을 저렇게 풍자하면서 살았구나 싶다.

창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의 감정이 저렇게 풍요로웠나 싶다.

감정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겠다 싶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공감되고 집중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편하게 다가온다.


서양음악은 해설을 미리 듣고 그 지식으로 이해하려 애쓸 뿐 공감은 어렵다.

우리 음악은 해설을 듣게 되면 애쓰지 않아도 더 깊게 공감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정서가 없고 문화를 읽을 수 없어 공감하기 어려워 아무리 훌륭하다 칭해도 위로와 공감을 주기보다는 거슬리게 된다.


어린아이는 한두 가지 옹알이로 시작해서 말을 배우고 소통하며 공감을 배운다.

고대인들도 활을 튕기는 한두 가지 소리를 음으로 시작했다. 그들에게 현대의 베토벤 교향곡을 들려주면 시끄럽다 난해하다 하지 않을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문화공연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천 원의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을 몇 년 동안 지속하고 있다. 많은 서민들이 이를 통해 클래식과 오페라와 마당놀이 등을 거의 무료로 접하게 되었다.

악단의 연주를 들으며 어디서 박수를 치고 언제 앙코르를 불러야 되는지 누군가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해설을 듣고 그것을 연주하는가 보다 하면서도 공감이 되지 않으니 길어지면 지루하고 집중하기가 어렵다.


클래식 음악을 알면 귀족계급이고 모르면 하층계급처럼 여겨져 모른다 하지 못한다.

듣긴 들었는데 제목을 모를 뿐이고 알긴 아는데 제목만 알 뿐이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면 능력자이고 실력자로 인정되고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면 아무리 좋은 스펙을 가졌어도 무능력자로 취급당하는 것과 유사하다.

선진국이 대세고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었고 그들의 문화인 클래식이 최고이다 보니 그것을 모르면 선진이 아니고 후진이 되는 것이고 도태되는 기분이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공감되어 아는 것은 다르다.

낯선 것도 자주 들으면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탄생한 문화가 공감되지 않으면 문화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만 남게 된다.

번역서로 읽은 명작도 공감은 되지만 원어로 읽을 때 공감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처럼 언어가 주는 문화장벽과 음악이 주는 문화장벽도 비슷하다.


어느 문화가 더 월등하고 나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고 사는 곳이 다양하고 민족도 다양하듯이 문화가 다양할 뿐 다 같은 문화이다.

세상의 다양함을 두루두루 섭렵하듯 문화를 여행하는 것이 진정한 공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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