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끼는 것

공감하다

by 오순

역사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도서관에 나와 EBS의 [지식채널ⓔ]를 읽고 있다.


무심히 지나쳐간 많은 뉴스들 중에 눈에 띄는 몇 가지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든 내용들이다.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냥 스쳐가는 뉴스들은 머릿속에 기록되지 않고 흘러가버린다.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 속의 그들의 아픔이나 슬픔이나 고통을 공감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어머나 저런 일이 있었나'로 시작해서 놀라고 자신도 당할 수 있음에 두려워지는 단계까지가 허용되는 시간이 뉴스이다.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방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공감하고 위로하며 나누는 소통의 시간은 가지지 못하게 된다. 거기서 단절되어 모두들 자신들의 공포를 잊기 위해 살기 위해 들어온 뉴스를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을 지워버리듯 기억이 흐릿해지는 선택을 한다.


공감될 시간 없이 빠르게 쏟아지는 뉴스들은 시청자나 피해자나 모두에게 독이다. 공감이 없는 소식은 그저 가십거리이거나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격리되는 장벽을 세우게 된다. 피해자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는 것은 더 큰 가해가 된다.


공정함을 잃은 팩트를 확인하지 않는 빠른 뉴스는 가짜 뉴스 오도 뉴스가 되어 진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진짜가 가짜에게 밀리는 형국이다.

논리 정연한 가짜에 사람들은 현혹된다. 그 가짜는 의문을 품을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논리는 허술하고 공감을 받아야만 알 수 있는 진짜의 정서성 때문에 의문과 확인의 과정이 필요한 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빠른 거짓에 느린 진짜는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워 의심받고 기피하기 십상이다.


이런 뉴스들이 역사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역사는 제대로 기록되었다 할 수 있을까. 뉴스는 취재 나온 기자나 소식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큰소리나 액션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듣고 그것을 먼저 전한다. 그 소식에 따라 방향이 흘러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신으로 이어간다.


뭐가 이렇다더라 누가 그랬다더라가 발포되면 거기에 맞춘 반응들이 뒤따르고 나중에는 '~더라'가 아닌 '~다'로 확정이 되어 버린다.

'~더라'는 추측성이지 팩트를 전하는 뉴스가 아니다. 추측은 편파적이기에 오류를 낳는다. 그 오류는 진짜 팩트를 밀어내 버린다.


인디언을 몰아내고 이룬 미합중국, 광주를 폭도로 몰아 짓밟은 광주사태, 월드컵의 광기 속 축구공에 포함된 아동노동, 저렴한 햄버거에 들어간 소고기에 들어있는 이상기후변화 등등 우리가 그저 흘려버린 그 속에 공감을 찾아내는 진짜 뉴스를 만들어내는 지식채널이다.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얼마나 모르는지 모르는 얼마나 아는지 모르는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

생각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이 진짜 임을 알게 해 준다.


역사는 이렇게 재조명되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기록만이 아니라 살아남지 못한 자의 기록도 같이 공존해야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어느 한편만을 기록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며 공평을 잃은 것은 강자의 일기이지 역사가 아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양한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