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와 포용
공원을 산책하는 중 일요예배를 마친 무리들이 떼 지어 온다. 양복과 양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A3 크기의 패널과 팸플릿을 들고 있다. 슬쩍 보니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은니 어쩌고저쩌고 쓰여있다. 그들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휴지 팩을 건네주며 예수를 믿으라 한다.
선 캡을 쓰고 있어서 얼굴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거부하기가 좋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그들을 지나쳐 갈 수 있었다. 투명인 취급하며 지나가니 무시당했다고 생각되었는지 그들 중 한 아줌마의 시니컬한 웃음소리가 드높게 들린다. 아마도 그중에 목사나 전도사도 같이 있어 그들을 무시한 것에 대한 기분이 상한다는 항의처럼 들린다.
왜 그들은 이렇게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일까. 자기들끼리 아주 만족스러운 마음이 합치되어 하나의 테두리를 두르고 돌아다닌다. 조폭은 아니지만 자기들만의 세계를 테두리 짓는다는 것에서는 비슷하다. 좋은 것을 나누고 싶으면 진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그들을 도와주면 될 것을 곱게 차려입고 소풍 하듯 산책하는 사람들을 휘젓고 있어 모양새만 좋은 그들에게 고운 마음은 아니 든다.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거부도 이해하지 못하고 소화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사람을 인도한답시고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이 가소롭다. 네가 뭔데 우리 우두머리 목사를 무시하냐는 듯한 비난을 가장한 비웃음이었다. 이건 인도가 아니라 적대이다. 포용이 아니라 거부인 것이다. 혹자는 사람을 위한 종교이지만 사람이 하는 것이라 실수도 있고 잘못도 있으니 사람을 보지 말고 종교를 보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어찌 종교를 보겠는가. 있는 그대로 사람을 보는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닐까.
산책하는 사람들이 봄이 없다며 한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없긴 겨울에 실내에 잔뜩 움츠려있다가 봄에도 나오지 않으니 봄을 못 느낀 것이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봄을 따뜻한 것으로만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봄은 겨울을 보내는 좀 춥고 시샘까지 받는 때로는 따뜻하고 때론 엄청 춥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고 옷이 얇아져 겨울보다 더한 추위를 느끼게 만든다.
추우니 봄이 아니라고 나오지 않고 있으니 봄의 변화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꽃이 활짝 피고 따뜻해져서야 나오니 반짝하고 봄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운 여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봄은 꽃을 피우기 위해 긴 겨울을 보내고 아직 남아있는 추위를 견디며 봄은 와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따뜻하고 어떤 날은 추웠다. 올봄에 매일 나와 보니 봄은 길었다.
그냥 있는 봄을 자기들 생각대로 줄여버린 것이다. 봄은 따뜻하고 꽃 피는 계절이 아니라 겨울을 보내며 겨울 끝자락 추위를 견뎌내며 여름이 오기 전 따뜻함 유지하여 꽃을 피워내는 것이 봄이다. 그리고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해지며 무더워지는 여름이 오기 시작하면 봄은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뜻하지만 조금 덥다고 해서 여름이 아니라 봄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과도기이기도 한 것이 봄이고 사계절의 특징인 것이다. 봄과 가을이 과도기적 특징이 강해서 너무 짧거나 기온 이상으로 없어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겨울과 여름은 그들의 추위와 더위의 강한 특성 때문에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어 더 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계절에 넘겨주어야 할 시기까지 그들에게 할당되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이 길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서로를 다르게 구별하는 정확한 테두리는 없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테두리는 없는 것이다. 사계절에도 한계 짓는 정확한 테두리는 없다. 서로 그렇게 오고 가며 섞이다 흩어지고 다시 섞이며 가는 것이 계절이요 삶이다. 어느 계절만 좋다고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듯이 삶도 정해져 있지 않다. 흐르듯이 더불어가며 사는 것이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