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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하기 좋은 날

비오는 날

by 오순

비가 내리고 있다. 좋다. 내가 좋아하는 날이다.

비가 좋은 것이 아니라 빗소리에 세상이 고요해져 좋다.

소리는 있으나 소리가 울리지 않고 잠겨 들어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다.


비만 오면 어디든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단순하게 비가 좋아서 그런가 생각했다. 비 오는 날 좋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 했는데, 나도 제정신이 아닌가 그런들 어떠하리 상관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가 좋은 게 아니라 비가 오면 모두들 움직임이 작아지고 소리도 작아지고 조용해져 좋았던 것이다.


비에 젖는 것은 싫으나 쓰고 있는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규칙적인 소리가 좋다. 마음을 달래주듯 일정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일정한 톤으로 울리는 소리가 편안하고 좋다. 온갖 것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소란을 피워 대 정신이 없는데 비가 오면 잠잠해져 좋다.


수영도 했고 따뜻한 믹스커피도 한잔 마셨고 낙서하듯 그림을 그려야겠다. 잘 그리려 애쓰지 말고 비판의 시선으로 그리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보자. 즐기고자 하니 그래도 잘 그린 것은 아닌데 마음이 무겁지는 않아 이만하면 되었다 싶다. 색감을 좀 넣으니 좀 더 그럴싸해져 기분이 훨씬 나아진다.


집중이 안 된다. 아마도 욕심을 부려서인 듯하다.

흐르듯 마음이 흘러가야 작업도 흐르듯 흘러나올 것인데 집중이 잘 되는 비 오는 날이니 그럴싸한 작품을 만들어내보고 싶은 욕심이 마음을 가득 채워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욕심을 내려놓으려 해도 너무 힘을 준 것인지 비워지지가 않는다. 채워진 것은 보이지 않는 욕심인데 비워내려 하니 어디에서부터 비워야 하는지 잡히지가 않는다.


채울 때는 자기 맘대로 채우더니 비우려 하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제기럴, 비워질 때까지 또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야 되는 것인가. 아까운 시간들이다. 가득 찬 항아리에 무엇을 넣으려 해도 들어가지 않고 너무 꽉 차 끄집어내려 해도 꺼내지지가 않듯 욕심으로 가득 차버린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제풀에 깨지거나 삭아서 짓눌린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모를까.


참내 내 맘인데 내 맘대로 안 되는 마음이 내 마음이겠는가. 그럼 그 마음은 누구의 마음이려나. 하고자 하는 마음은 급한데 우물물에서 숭늉 찾듯 속만 탄다. 그렇다고 노닥거리며 기다릴 여유도 없으니 이를 어쩐다. 오늘은 이러라고 있는 날인가.


비가 오는데 하루 종일 올 것 같은데.

좋은 날인데 작업하기 좋은 날인데.

이사하기 좋은 날 마냥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날이 아닌데.

으씨 파전에 한잔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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