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귀가 아프다. 실제로 아프다기보다는 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참아야만 하는 소리들로 인한 신경이 아프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여 소리의 아우성을 만들고 싶어 하는 노년들의 욕망을 피하기가 어렵다. 떠날 수 없으니 참아야 하고 피할 방법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용트림을 해본다. 노년들은 청력이 약해져서 소리조율이 안되니 더욱더 요란스럽기 그지없다. 떠드는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수다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함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천정이 울리게 시원하게 내지른다.
노년에게는 자극이 거의 없다. 외부정보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흘려버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정보나 자극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이 중요하다. 그 일상도 어느 날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것이기에 하루의 일상이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것들이 되풀이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오 하루를 마무리하는구나 하면서 살아간다. 이 무사히가 노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케어가 필요한 유아들에게도 해당된다. 단지 유아와 노년의 차이는 그 일상을 확장하느냐 잃어가고 있느냐의 차이이다. 잃는다는 것과 획득한다는 것은 작은 차이이지만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다. 똑같이 반복을 즐기지만 아이는 통제하고 확장해 나가기 위한 배움의 과정이고 노년은 잃지 않기 위한 유지의 개념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어제 들은 이야기를 노년은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해도 감정이 다 다르다. 물론 유아도 다 다르지만 새로움을 추가한다. 노년은 유지가 원칙이기에 자신이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기에 사건은 같아도 받아들이는 감정은 다른 것이다. 그들의 수다를 들어보면 거의 같다.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그들은 이야깃거리가 넘쳐난다. 그들에게는 수다가 자극이고 정보이다.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이 그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것들을 현재형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또 그 소리야 그만 좀 해 아휴 잔소리. 잔소리 듣기 싫어 젊은 층이 아우성을 쳐대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과거가 항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치매 걸린 것처럼 항상 같은 것이 항상 새로운 것이다. 익숙한 것이 그들에겐 새로움이다. 있는 것을 가지고 닳아질 때까지 누덕누덕 우려내는 옛날이야기이다. 아마도 옛날이야기는 아이와 노년들이 좋아하는 소재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자극과 정보를 걸러내고 쳐내기 바쁜 젊은 층에게는 반복이 시간낭비이고 무위 한 일이다.
그들은 젊은 층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관심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다. 노년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어떠한 것들은 아예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간혹 생각을 해야 기억나는 것들이다. 생각나는 대로 떠들고 그곳에 자신이 있음을 동조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새로운 자극이 거의 없이 노년의 일상은 매일 먹고 자고 하는 것들뿐이다. 그러기에 아주 사소한 것들도 커다란 파문이 일정도로 그들의 관심을 끌고 길게 길게 우려낼 소재거리이다. 자극이 많고 정보를 수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젊은이에게는 멈춰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끝없이 반복하여 이어지는 노년들의 수다를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반복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의 신경은 새로운 것을 향해 가야 하기에 노년들의 관심거리는 잔소리요 방해만 될 뿐이다.
늙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들의 욕망을 이해하라는 것은 무리수가 아닐까. 젊어본 노년이 늙어보지 않은 젊은이를 어려서 모른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극히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에 웬만해서는 이해라는 단어가 먹히지 않는다. 이해라기보다 그냥 놔두는 것조차 용납하기 어렵다. 콩밭에 잡초도 같이 자라듯이 그냥 놔두는 것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년은 노년대로 젊음층은 젊은 층대로 각자 살아가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젊어봤다고 자신들이 무슨 지혜라도 소유한 양 자신들을 예우하기를 바라는 것은 판단착오이다. 늙어서 늙음에 집중하느라 젊음은 그저 추억일 뿐 현재가 아니기에 젊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는 척 다 아는 척할 뿐이다. 젊은 층이 늙음을 이해하지 못하듯 젊음과 늙음의 그 둘의 한계선을 넘나들기가 거의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단지 그랬었지 그랬을 거야 그럴까 하는 정도의 추측성 일뿐이다. 그러니 젊은이를 지혜가 모자란다고 무시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노년의 수다를 무위 하다고 무시하는 것도 무례한 것이다. 그저 그들만의 삶을 표현하는 것들이기에 서로 강요하지만 않으면 공존과 존중이 가능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