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도 나의 것
젊은 사람들은 아줌마들이 젊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주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남자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건장해서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하고 관리를 해도 무너져가는 몸을 알기에 건강한 몸이 부러운 것이다.
젊은 여자는 건강보다는 예쁘고 날씬하다는 차원이라 건강함과는 좀 다르다. 날씬한 몸보다는 건강한 몸을 더 원하는 나이가 된 아줌마들이 여자라는 무늬 때문에 언감생심 이성에 껄떡대는 후줄근한 주책바가지로 비쳤을 것이다. 그 나이가 되어 노화되어 가는 몸을 체험해 보아야 이쁜 몸보다 건장한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하면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다. 결국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높다.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멈춰 있는 분란을 방지하는 것이리라.
판단보다는 관망이 사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쫓겨서 살아오는 동안은 판단이 앞서서 더욱 척박했는데 이제는 관망하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그만두기는 참 쉽다.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것이 어렵다. 진척이 없고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으면 그만두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지 그러하다면 왜 그러는지 알아보고 탐색하여 지속한다면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알아보지도 않고 절망해 버리고 그만둬 버리면 결국 자신의 선택에 대한 노력이 힘을 잃고 소진되어 버린다.
실패는 끝까지 갔을 때의 결과이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일 뿐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변수만으로 계산해 보고 미리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계산이다. 자신만 실패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은 것은 착각이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다. 성공만 있는 선택은 없다. 무수히 세뇌를 해도 중간중간 자잘하게 좌절의 구멍에서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다.
학창 시절 선생들이 짜놓은 수업 시간을 각 반에 배당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서 준수해야만 했다. 왜 한문을 배워야 하는지 왜 고전을 배워야 하는지 왜 교련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의식이 없이 당연히 주어진 것이니 따라야만 하는 규칙으로 알았다.
어느 날 나이가 좀 지긋한 영어 선생 겸 아마 교무주임이었나 싶은데 갑자기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쳐댔다. 앞에서부터 긴장한 학생들은 어떻게든 반듯한 직선으로 줄을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고함소리에 놀라고 긴장한 학생들은 뒤로 갈수록 행렬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뒤가 어떤지 돌아보지 못하니 알 수 없었다. 그 줄에 맨 뒤에 위치한 그녀는 어디서부터 비뚤어졌는지 모르겠으나 그 모습에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 많은 교련시간을 지내왔지만 이번처럼 행렬이 곡선을 이루는 것은 처음이었다.
교련시간은 키 큰 순서대로 줄을 서기 때문에 제일 작은 그녀는 항상 맨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간신히 그 교련시간을 버텨내고 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영어 선생의 고함소리는 그나마 유지되던 정렬이 잘 되기보다는 더 방해가 되고 있었다. 아마 빨리 끝내고 싶어 서두른 듯하였다. 그도 이 교련이 마땅찮으나 정부에서 의무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그런데 교련 선생이 지나치게 잘하려고 난리 치는 꼴을 보다 못해 분통이 터진 듯하다.
교련 선생이 그 영어 선생의 옛날 제자라서 그의 고함소리에 그 드센 여자가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의무이니 빨리 이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끼어드는 바람에 빨리는커녕 더 연장이 되고 있었다. 그 교련 선생의 지나친 열성도 싫었지만 땡볕에서 줄 서서 명령에 따라야 하는 그녀 자신도 싫었다. 선생들이 인정해 주는 우등생인 그녀의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게 된 그는 체면이 서지 않았는지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교무실로 사라졌다.
교련 선생을 비롯한 다른 선생들과 학생들 모두 졸아서 그렇게 교련시간은 어영부영 대충 마무리를 했다. 왜 교련을 그렇게 열심히 강요했는지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것이 북한과 마찬가지의 군사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한이 하면 정당한 방어준비이고 북한이 하면 독재이고 전쟁준비가 되는 것이 군사훈련이었다. 그녀는 군사 독재니 자유주의니 하는 이념들의 혼란 속에 있었다. 그런 이념들에 관심이 없는 그녀는 나서지도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은 채 아웃사이더로 떠돌며 지냈다.
거의 평생을 그 자신에게서도 그녀는 아웃사이더였다. 인생을 낭비한 것이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웃사이더가 아닌 독립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세습된 교육과 문화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독립이자 자유이었다.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자신이 부서지는 것이 무서워 모든 것을 거부도 못하고 회피만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너무 늦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시작하려 한다. 방황하고 회피한 것도 자기 보존의 삶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그 삶들이 그녀의 것이 아닐 수 없듯이 모든 것을 회한 속에 끌어안고 그냥 그 자리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고목에도 새싹이 나지 않던가. 웃는 법을 잃어버린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긴 하지만 그냥 한 발씩 내디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