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들
비 온 뒤끝인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댄다. 왜 살랑살랑 불지 않고 휘몰아쳐 부는 걸까. 바람이 화난 것일까. 뭐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나뭇잎이랑 놀고 싶어 같이 춤을 추는 것일까. 너무 심하게 휘몰아치니 나뭇잎이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저건 숫제 노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것 같다.
내가 나뭇잎이라면 바람에게 진정 좀 하라고 하고 싶다. 우산을 쓰고 나가면 우산도 날아가 버릴 기세다. 집안에 있으니 망정이지 나를 어디 모르는 곳에 실어다 놓을지도 모를 바람의 위세이다. 그곳이 어디이든 날아가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조금 무섭기도 할 것 같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다가 갑자기 바람이 멈춰버리면 어쩌지. 굴러 떨어지겠지 죽기야 하겠나.
브레이크가 아니라 액셀을 밟은 자동차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굴러가다가 어딘가에 부딪혀 찌그러지듯이 찌그러져 버리는 것 아닐까. 찌그러지고 아픈 것은 싫은데.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나뭇가지가 휘청거린다. 저러다 가지가 꺾일 것 같다. 새들도 바람을 피해 어디론가 숨은 것 같다.
바람은 언제 진정될 것인지 모르겠다. 자기 맘대로 왔다가 자기 맘대로 가는 자유분방한 바람이다. 누군가 시원하게 땀을 식혀 주기도 하지만 누군가 거센 바람에 다칠 수도 있다.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다. 바람을 이길 자가 없다. 모든 것들이 휘날린다.
밖에 나가보니 바람은 거세지 않고 의외로 부드러웠다. 커다란 나무에 커다란 가지들이라 저항이 강해서 바람이 더 거세게 부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바람은 그렇게 성나지 않았다.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실제로 접하는 것은 많이 달랐다.
무뚝뚝하게 보이는 사람이 한번 소통하면 의외로 엄청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바람은 거칠지 않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거세게 느껴지기도 부드럽게 느껴지기도 하나 보다. 바람이 잔잔해지니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린다.
비와 바람이 교대로 왔다 갔다 하는 날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왔다 갔다 하듯 서로를 견제하는가 아니면 서로 공감하여 위로하는가. 경계가 애매하여 집중할 수가 없다. 버티다 의미 없어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한다. 나와보니 같은 마음인지 각자만의 사연이 있는 것인지 많은 이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바람도 부드럽고 내리는 비도 조용하다. 진하게 커피를 조용히 탐닉하고 싶다. 이미 커피타임을 한 후라 마음만 생각만으로 음미해 본다. 어딘가로 가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기도 하고 수다를 하며 노닥거리고 싶기도 하고 다 귀찮기도 하다.
산책이 끝날 때쯤이면 이것들도 다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상념들이리라. 무겁지 않게 집착하지 않고 떠나보낼 감상이려니. 괜히 붙잡으면 술 한잔으로 끝나지 않고 탈이 나게 마련인 얍삽한 감정들이다. 바람에 조용히 실려 보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