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용그릇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 심하게 경사가 진 언덕에 계단이 층층이 이어져 있다. 그 긴 계단 중간쯤 쉬어가는 넓은 계단 바닥에 물그릇 하나와 밥그릇 하나가 한쪽에 항상 놓여 있다. 아무 고양이나 들러서 밥을 먹고 물도 마시고 쉬어가라고 누군가가 갖다 놓은 것이다. 인적이 드물기도 하지만 혹여 지나가는 그 누구도 밥그릇을 밀치거나 걷어차지 않는다.
간혹 어떤 날은 고양이가 밥을 먹는 것이 눈에 띄기도 한다. 고양이가 먹고 남긴 사료를 까치가 와서 먹고 있다. 몰래 남의 밥 훔쳐 먹듯 엄청난 경계를 하며 잽싸게 먹고 날아간다. 조금 더 있으니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어기적 어기적 밥그릇 쪽으로 걸어간다.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먹는다. 배가 부르고도 남았을 텐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비둘기는 떠나지 않고 계속 먹는다. 저러다가 날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어지간히 배를 채운 비둘기는 뒤뚱뒤뚱 걷다가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쉬고 있다. 다른 비둘기가 날아들어 먹는다. 까마귀도 날아와 먹는다. 참새도 참여한다. 멀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로 파리도 날아들어 한몫 챙겼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한 개의 사료가 파리 몸통보다 크지 않을까 싶다. 파리가 먹는 양은 표시도 나지 않지만 배불리 맘껏 먹었을 것이다. 그 그릇이 비워지면 다음날 누군가가 그득 채워 놓고 간다. 그렇게 그곳에 놓인 밥그릇과 물그릇은 공용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식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누구의 것이기도 하다. 먹고자 하는 이에게 모두 허용된 밥그릇이다. 작은 배려가 많은 생명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이런 밥그릇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에겐 감나무에 감을 수확해도 까치가 먹고 갈 감 두서너 개는 남겨 놓는 풍습이 있다. 낮은 담장 너머로 음식을 나눠먹는 관습도 있다. 배고픈 거지에게 뭐라도 하나 챙겨 주어 헛걸음하지 않게 하였다.
생명을 배려하는 것이 공존이고 여유가 아닐까. 고양이가 남긴 것이 까치밥이 되었다. 까치가 남긴 밥이 비둘기의 밥이 되고 비둘기가 남기 것이 참새의 밥이 되고 참새가 남긴 것이 파리의 밥이 되었다. 꼭 누군가에게 베풀려고 작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베풀어지는 것이 감나무 위의 까치밥이다.
내 배 부르다고 남의 배고픈 것을 모르쇠 하는 것은 공감을 못하기 때문이다. 꼭 도덕으로 법으로 규율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하찮은 버러지라도 다 생명이고 살만한 자격이 있어 세상에 있는 것이다.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배려이고 사랑이고 공존이다.
도서관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의 긴장이 풀어진다. 비록 도심 속에 살지만 그 안에 기거하는 생명들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다들 주어지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구나. 그만 투덜거리고 혼자만 예민한 척 신경 곤두세우지 말고 공존을 인정하자.
내가 예민하다는 것은 타인을 인정할 여유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말은 하지 않아도 거칠지 않은 온화한 행동거지가 상대를 편하게 해 주고 나도 편하게 해 준다. 소통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아도 가까이 있으면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느껴진다. 물론 나도 상대에게 어느 정도 파악된다.
개인 공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공용 공간에 왔을 땐 살짝 자신의 영역을 뒤로해야만 서로 편해진다. 오랜만에 공용시설을 오랜 시간 이용하다 보니 집중력이 필요할 때 날카로워지는 자신을 남 탓으로 돌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역시나 간혹 다른 이들이 예민하게 굴 때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싶다. 알아차렸든 몰랐든 간에 참 그 누군가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든다. 살아가면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