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른다
ㅇㅇㅇ플레이를 검색하여 그중 괜찮다 싶은 시리즈 드라마를 선택했다. 1화만 보고 작업을 해야지 했는데 1화 2화 3화 연속 보다가 보니 하루가 다 가고 있었다. 이렇게 늘어져 눈동자만 움직여도 될까. 하루를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에 팔아버린 느낌이다. 멍청한 물물교환을 한 것이라는 자책이 든다.
간신히 스페이스바를 클릭해 보던 것을 멈추고 일어났다. 책상에 앉아야 무엇이라도 하기에 일단 앉았다. 앉았는데 멍하다. 드라마에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어서 생각하는 뇌가 고장 난 듯 움직일 생각을 앉는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다시 드라마나 볼까. 하루 망친다고 죽지는 않잖아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 편을 더 보았다. 해가 기울어지고 있는 게 보인다. 기본이라도 하자는 각성이 온다. 다시 일어나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다고 무언가가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에 기다리기로 한다. 이젠 화면으로 도피하지 말자. 창밖이라도 보자. 하루 종일 쨍쨍한 여름 햇볕 아래 있는 건물들이 데워진 게 느껴진다.
예전 에어컨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해가 기울면 집 벽면들에 물을 뿌렸다. 긴 호스로 벽에 물을 뿌려주면 벽에서 생기는 열기가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저녁을 덥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에어컨이 한 집에 두세 대 씩 가동되어 그렇게 건물 벽에 물을 뿌릴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시원하게 물을 뿌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둘기 한 마리가 햇빛에 가열된 건물 난간에 내려앉는다. 비둘기는 덥지 않을까. 발바닥이 뜨겁지 않을까. 아마 더웠는지 금세 날아간다. 반려 묘는 에어컨을 피해 베란다 세탁기 위에 드러누워 자고 있다. 쓰다듬어 주려고 나가니 숨 막히는 열기가 느껴져 얼른 다시 들어왔다.
화면 보며 멍 때리는 것보다 창밖을 보며 멍 때리는 것이 더 낫다. 생각이 없다 했는데 가만히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부유하고 있다. 단지 의식으로 끌어올려 분석하지 않을 뿐 앞뒤 연결되지 않는 생각들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난다. 그냥 내버려 둔다. 굳이 끄집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고 싶은 작업은 의식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하고 싶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 봐야겠다.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오늘 안으로는 와야 작업 마치고 잘 수 있을 텐데. 하고 싶을 때 하면 속도도 나고 하고 나면 개운하면서 에너지가 다 소진되지 않아 좋다. 항상 이렇게 기다리다가는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아직은 시간에 크게 얽매이지 않아서 기다릴 수 있다.
먹을 시간이 아닌데도 배가 고팠는데 배고픔이 사라졌다. 가짜 배고픔이었나 보다. 심심해서 놀 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렸는데 이대로가 좋다. 심심한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재미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존재하고 있다. 창밖에 건물들이 존재하듯 베란다 세탁기 위에 반려 묘가 존재하듯 시원한 실내에 존재하고 있다.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다. 뭐 하고 있나 무슨 생각을 하나 판단하지 않고 흐르듯이 보고 있다. 편하다. 재촉도 없고 자책도 없고 비난도 없으니 조용하다. 오래간만에 내 안이 소란하지 않다. 보다 만 드라마를 보고 싶은 마음이 한 구석에서 손짓하고 있다. 아마 자기 전에 몇 개 안 남은 시리즈를 볼 것 같다.
내버려 둬야지 보든 말든. 그러려면 작업해야 되지 않나. 스스로 계산을 하고 있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니 지금 드라마 볼 것 아니면 하자. 가끔 하루 종일 누워 지내는 반려 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아무 생각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아무 생각이 없어야 저렇게 이완될 수 있을 것이다.
반려 묘가 자는 것을 보면 나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간혹 옆에 나란히 누우면 슬며시 저만치 가버린다. 거리 두기가 필수인 고양이 습성이다. 섭섭해서 궁둥이 한 번 치며 아쉬운 때만 밀착한다며 불평을 해본다. 상관없다는 듯 시크한 눈을 감아버린다. 시크하고 독립적인 태도가 마음에 든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고양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고양이 시선으로 바라본다 생각하니 이해는 아니지만 긍정은 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도 시크하고 독립적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괴롭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냥 긍정하게 된다. 시간은 참 필요하고도 중요하다.
시간을 붙잡아 매어 두고 싶지만 시간은 그대로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이 있어야만 새로운 시간들을 맞이할 수 있다. 흐르는 게 시간이고 삶이다. 오늘 낭비한 시간에 얽매이지 말자. 흐름 속에 내일의 시간이 또 있으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하지 않던가. 이 말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주인공이 손을 불끈 쥐고 말한 명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