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짐
어머니의 눈물이 너무 무거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덜어주지도 못하고 손만 보태고 있었다.
짐수레에 손만 얹어도 엄청 힘들어지듯 벗어나고 싶어진다.
또르르 데구루루 팅띵띵띵띵 또르르 떼구루르 팅띵띵띵띵
어디선가 띵띵 거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무거움을 가볍게 튕겨내듯 띵띵 두드린다.
우연히 접한 세미클래식이었다.
무거워질 때마다 처음의 가벼워짐을 느끼기 위해 열심히 들었다.
아니 매달렸다. 무거움을 회피하기 위해.
피아노 연주는 통통거리며 혼자 가듯 무언가를 이끌고 간다.
어느 날 지나가는 길목에서 그때의 그 세미클래식 반주가 들려왔다.
누군가 연습 중인 듯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리듬은 같았다.
그 리듬에 잊고 있던 어머니의 무거웠던 한탄과 눈물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는 좀 가벼워졌을까.
문득 나의 삶도 어머니 못지않게 무거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겠는가, 살수록 삶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그저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무거운 근심을 덜어줄 수 없어 몰래 마음만 힘들었더랬다.
표현할 줄 모르는 아이는 냉정한 자식이라고 원망만 들었다.
그 자식은 마음이 무거워 같이 울어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무거운 마음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가고 없는 세상에 나와 다른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인가.
내가 가고 나도 누군가는 남아서 살아가겠지.
무겁든 가볍든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떠날 때는 가벼워질까.
삶을 버리는 것일까 무거움을 버리는 것일까.
가벼움을 선택하는 것일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 끝과 저 끝은 서로 닿지 않기에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래도 끝이 있다는 것이 좋다.
끝이 있다는 것은 선택할 것이 생긴다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나는 회상하며 세미클래식을 듣고 있다.
익숙해진 소리에 편안함이 깃든다.
내 무거움을 회피하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닌데도 좀 가벼워지고 있다.
어떤 때는 떼구루루 혼자 가버리는 것 같아 냉정하다 생각했다.
생각 없이 뒤따르니 어느 사이 나란히 걷고 있다.
자꾸만 쳐지려는 나를 일으켜주듯 통통거리며 발랄하게 가고 있다.
자식이 어머니의 피아노소리였으면 위로가 되었을까.
어머니는 땅을 깊게 파듯 감정을 파내는 창을 좋아했다.
나는 창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 듣기 힘들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누군가 건져주기를 기다리긴 싫다.
그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고 싶다. 숨이라도 쉬고 싶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절대 가벼워질 수가 없다.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나는 바닥모를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종국에 도달점은 같을지라도 나아가고 싶다.
삶은 무겁지만 각자 선택한 각자만의 짐이고 무게이다.
너무 무겁다고 벗어던져지지 않기에 견뎌내야 한다.
그것이 삶이다. 무거운 것이 삶이다.
무겁지 않으면 아직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자기 짐을 떠 안겼거나.
끝까지 무거운 자기 짐을 지고 버텨낸 어머니의 삶이 나의 삶의 지표가 되었다.
무거워 다 버리고 훨훨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 날아가고 싶어질 때마다 그 지표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느 곳에 있든 자신의 짐은 내 던져지 않는다.
삶이 축복일까 속죄일까.
시지프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의 바윗돌은 그의 삶의 짐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처벌에 대한 속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