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남편의 여유가 가져다준 하얀 날의 단상
“여보, 우리 산에 가자. 이런 날은 산에 가야지.”
“그럽시다.”
남편의 말에 내가 응수했다.
그러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남편은
“산은 조금 위험할까? 동송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문화의 거리 걸을까?”
“그럽시다.”
“이런 날은 따뜻한 국물을 먹어주는 게 좋은데,
내가 짬뽕 국물이 맛있는 집 알고 있는데, 거기 가서 짬뽕 먹을까?”
“그럼 가서 아점 먹읍시다.”
그제 결혼 후 두 번째 집으로 14년 살았던 교하 아파트에서,
여생을 새롭게 시작할 포천 자연 속으로 남은 짐을 옮겼다.
이사 전날은 이사와 관련된 일 처리,
위 아랫집은 소박한 마음을 건네며 이삿날 소란스러움을 전하고,
옆집과는 집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눴다.
윗집에서 아이가 뛰어서 미안하다며
사과, 귤, 토마토, 천리향이 든 봉지를 건넨다.
아이가 뛰는 소리에 남편은 조금 민감했지만,
나는 전혀 괜찮았는데.
밤에는 짐 정리를 하느라 한숨도 못 자고,
당일은 이사업체를 돕고,
이사 후에는 청소해 둘 필요가 있어 혼자서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했다.
나를 배웅하고 맞이하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호젓한 길을 달려
새로운 곳에 와서 잠을 잘 잤다.
많이 피곤했던 탓에 늦게 일어나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축복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이 제일 예뻐요.”라고 했던
옆집 정년 한 여교장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보육실습 지도 업무 처리를 하고,
보기 드물게 많이 내린 소복이 쌓인 눈을
대문 근처와 골목을 쓸었다.
정리해야 할 이삿짐이 산더미이지만,
동송으로 향했다.
철원 하면, 멀게만 느꼈는데,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살게 될지 몰랐다.
차 안에서 업무적으로 전화 연락을 해야 할 곳에
연락하는 것을 보고 남편이 한마디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든 장면이 풍경화네,
이런 날은 여유를 갖고 감상하지?”
눈을 들어보니 하얀 눈이 바꿔 놓은 세상은
산 수를 그린 한 폭의 동양화이기도 했다.
동송가는 길은 두 곳인데,
풍경이 더 아름다울 것 같은 꾸불꾸불한 옛길을 택했다.
빙판에서 두어 번 차가 미끄러질 뻔한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남편이 천천히 운전해서 ‘교동반점’이라는 곳에 들어섰다.
음식점에 들어서자 40대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맞아준다.
체온을 재고 QR코드를 체크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금방 주문한 짬뽕이 나온다.
남편이 맛을 자랑했던 국물부터 먹었다.
코끝에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고 입은 춤을 춘다.
짬뽕에는 내가 좋아하는 김치가 들어 있는 게 특이했다.
버섯, 오징어 등도 보인다.
여주인과 몇 마디 해보니,
이분은 요코하마에서 20여 년 살다가
3년 전에 들어왔단다.
자연히 동경에서 7년 유학한 나와
교환 공무원 포함 2년 일본 생활을 한 남편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여주인이 동송 태생이라는 말에 현지 사정도 물었다.
맛있는 쌀도 얘기하면 구해줄 수 있고,
순대국, 만두국 맛있는 집도 알려준다.
“고사리 많은 곳 아세요?‘
이 분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이 되면 이른 새벽에는 고사리, 취나물, 고비? 등을
따러 다닌다고 한다.
어떤 곳은 관광버스가 사람들을 태우고 와서
나물 채취할 사람들을 풀어놓는 곳도 있을 정도란다.
나중에 우리가 있는 곳에 차 마시러 오라고 초대했다.
그와 나는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남편은 동송이라는 곳이 마치 고향과 같이 느껴진단다.
시내에 가서 보리차를 넣어서 끓이는 기구, 수세미, 화분 받침 서너 개와
두부, 조기, 갈치, 꽁치, 떡국을 사서 돌아왔다.
아점으로 국물도 남기지 않고 먹은 짬뽕 덕분에 배 속이 든든했다.
만찬은 밤 8시부터 있을 글쓰기 강의를 한 시간 남겨두고,
낮에 사 온 생선으로 맛난 냄새가 풀풀 나는 구이를 해서 먹었다.
남편은 “과일만 먹고 들어가. 설거지는 내가 할 게.”라고 한다.
눈 내리는 날,
낭만을 즐기자던 남편의 넉넉한 마음 덕분에
맛난 짬뽕도 먹고,
내가 자연생활에서 꼭 해보고 싶은 산나물 채취를
같이 해볼 수 있는 인심 좋은 이웃을 만날 수 있었던 하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