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의 절창, 모심(母心)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시인 문정희 시‘동백’의 일부분이다. 구순을 앞둔 엄마가 동백나무를 사 와 정성 들여 키웠다. 햇볕이 좋은 날은 밖에 내놓고, 추운 날에는 실내로 들여놨다. 그렇게 동백이 피고 지기를 두 해가 지나, 지난해 늦가을 이사한 우리 집으로 왔다. 날씨가 추운 곳이라 실내에 들여놨다. 동백나무는 자리를 옮겨 힘 드는지 올해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 엄마는 팔로 동백꽃 모양을 그리며 말했다.
“엄마가 생각이 있어 샀다. 빨간 동백꽃이 요렇게 시루처럼 별나게 탐스럽고 예쁘게 피어야.” “내가 죽고 없더라도 이 꽃을 보고 엄마 생각해라.”
서두의 시를 빌려온다면 가장 눈부신 꽃은 소멸 후 자식을 배려한 노모의 마음이다. 내가 동백을 만난 것은 여수 오동도와 강진 백련사에서다. 송창식의 ‘선운사’ 노래에서처럼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동백을 보았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걸었을 백련사 동백은 애잔함으로 남아 있다. 억울하고 서러운 시대를 논했을 두 사람이 그리워서이리라. 이렇듯 엄마는 동백나무에 그리움을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는 남녘 하늘 아래에서 평생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혼자 지내다 10여 년 전 서울과 그 근교에 사는 자식들 가까이 왔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혼잣말을 한다.
“사람들이 물고랑 송사리처럼 모여 사는구나.”
엄마는 답답해했다. 마당 한쪽에 감나무, 포도나무가 서 있고 장미, 들국화가 피고 지는 화단과 상추, 파를 심던 텃밭이 있는 고향 집을 그리워했다. 엄마의 여생을 텃밭이 있는 집에서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선택한 곳이 바로 산세 좋고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포천이다. 엄마는 이사 오자마자 텃밭에 마늘, 시금치 등을 심었다. 시금치는 봄나물로 해 먹고, 마늘은 땅속에 열매를 키워가고 있다. 토란, 상추, 파, 고추 등은 해 질 무렵 물을 주는 엄마의 정성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식물에 정성을 기울이듯 엄마는 6남매를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절대적 가난의 시절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동네로 시집왔던 엄마 이모는 친정 조카를 사람 좋던 아버지와 중매했다. 시집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천성이 부지런한 두 분은 남의 논밭까지 일궈, 시누이와 시동생을 출가시키고 자식들을 키워냈다.
엄마는 논밭에서 일하면서도 혼자서 식구들 끼니도 챙겼다. 여름이면 보리쌀을 삶아두었다가 꽁보리밥을 하거나 그것도 없을 때는 밀가루죽을 썼다. 겨울에는 곡식을 아끼려 무채, 고구마, 조를 넣은 밥을 지었다. 이십 리 길을 걸어 게와 맛을 잡아 와 식탁에 올리고, 십리 길 오일장에서 갈치, 고등어를 사 와 아궁이 불에 맛나게 구워냈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평상에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저녁을 먹던 장면은 나의 유년 시절 원풍경으로 남아 있다.
엄마가 나에게 준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넉넉하지 않았지만, 양념 딸을 공주처럼 키우고 싶어 한복을 만들어 입힌 엄마, 명절에 내가 없으면 온 가슴이 텅 빈다던 엄마, 나를 보러왔다가 서울역에서 열차 타기 전 “나한테는 딸자식은 하나이다.”라고 했던 엄마, 딸 생일날 미역과 용돈을 부쳐주던 엄마, 나이 들수록 따뜻하게 자야 한다면 목화솜으로 이불을 만들어 보자기에 싸주던 엄마, 손수 속옷까지 만들어 준 엄마…….
이 모든 사랑을 동백꽃에 남기려는 엄마가 요즘 들어 세 살 아이처럼 주로 잠을 잔다. 엄마 아이를 이제 자식이 돌볼 차례이다. 순환하는 자연은 산들바람 불고 따스한 날이 있는가 하면, 비 오고 눈 내리는 날도 있다. 본능적 무의식이 드러나는 부모 자식 관계도 그러리라.
동백의 절창, 모심(母心)이 퇴색하지 않도록 할 일은 자식 몫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