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난 녹두장군 전봉준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내가 1894년에 농민 봉기를 일으켜 한양까지 온 정읍 고부 태생 녹두장군 전봉준을 만난 건 서울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서다. 영풍문고에 가던 중 바로 그 건물 앞에서 시인이 읊고 있듯이 살아있는 듯한 그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쳤다.
누구를 바라보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양손은 바닥을 짚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으나 상투 머리에 질끈 맨 한복 저고리와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동상 앞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이라 써있고, 뒤쪽에는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제법 긴 글이 새겨져 있다. 다음 동상에 새겨진 전문이다.
“전봉준(1855-1895)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1894년 이 강산을 뒤덮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지휘한 동학농민군은 부패한 벼슬아치를 몰아내고 폐정을 바로잡기 위해 봉기하였다. 농민통치기구인 집강소에서 개혁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이 침략음모를 꾸미자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이 주력인 진압군에게 패배한 뒤 전옥서(한성부 중부 서린방)에 갇혔다. 그리고 권설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내린 다음 날인 1895년 4월 24일 새벽 2시에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이제 순국 123주년을 맞이하여, 국민성금을 모으고 서울시의 협조를 받아, 종로 네거리 전옥서 터에 녹두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동상으로 세운다. 2018년 4월 24일 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녹두장군은 세상을 떠난 지 123년 만에 마지막을 보낸 ‘전옥서’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 동상 건립을 주관했던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 고(故) 이이화 재야 역사학자를 그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문패 위에 ‘교유명야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뜻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허균의 호 교산에서 ‘교’, 정약용 생가의 여유당에서 ‘유’, 전봉준의 자 명숙에서 ‘명’, 아버지 이달의 호 ‘야’산에서 야자를 가져와 새긴 편액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녹두장군은 후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도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주인의식의 중요성을 얘기하며 이순신, 장보고, 전봉준 예를 들고 있다.
송우혜 소설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천적 의지를 전한다. “다큐 프로그램 PD 한 분이 내게 질문했다. ‘지난 세기말에 동양에 존재했던 영웅들 중에 중국의 리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있지 않은가. 같은 시기에 그에 비견할 만한 한국의 영웅으로서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내 나의 마음 깊은 곳을 세차게 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힘 있게 대답했다. ‘전봉준이다. 전봉준이야말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분으로서 그들에 못지않은 대인물이었다(마음의 종. 송우혜, 문화일보 2009.5.30.).”라고 했다.
또 “전봉준의 실체를 알리고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 나의 남은 삶을 쓰리라!”고 다짐한다. 이를 실천하고 있는 소설가도 있다. 한승원은 녹두장군이 1894년 겨울에 순창에서 붙잡혀 천릿길 한양으로 압송돼, 이듬해 봄에 처형되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바로 <겨울잠, 봄꿈> 소설이다.
녹두장군 유언은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리라.”로 전해진다. 그는 이제 정읍뿐만 아니라 서울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서 자신이 못다 이룬 개혁을 완성해 달라고 말을 건네고 있다. 각자 처한 곳에서 실천으로 답할 때가 아닐까 싶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그에게 목도리와 외투라도 입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