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처럼

by 최순자

“통일된 조선에 돌아가고 싶어요.”


25년 전 내가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일이다. 한국에서 오신 지인과 조치(上智)대학을 갔다. 독일에서 온 루메르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일본 몬테소리협회 회장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지인이 신부를 만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루메르 신부는 조치대학 내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숙소 입구에서 안내를 보고 있는 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안내자는 그 대학 대학원생인데 재일교포라 했다. 북에서 온 아버지와 남에서 온 어머니 사이에서 자신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니 아버지 고향인 북에만 갈 수 없고, 어머니 고향인 남에만 갈 수 없으므로, 조선이 통일되면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쪽과 연결이 된 재일교포들은 한반도를 조선이라 표현한고 말했다.


청년은 이 얘기를 들려주면서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도 했다. 나도 내가 태어난 나라와 관련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 적이 있다. 동경에서 어느 날 캐나다 사람을 만났다. 서로 어느 나라에서 왔고 이름을 대며 인사를 나눴다.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가 되묻는다. ‘북쪽’인지 ‘남쪽’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남과 북을 얘기할 때 당연히 ‘남’을 먼저 얘기하고 ‘북’을 얘기한다. 그런데 외국인은 나에게 ‘북’을 먼저 얘기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코리아’라고 하면 당연히 나를 ‘남한 사람’으로 알아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북한 사람’이냐, ‘남한 사람’이냐는 묻고 있다. 이 체험은 나에게 나의 정체성에 대해 큰 충격을 주었다. 또 학창 시절 생각했던, 남북통일의 문제를 다시 상기 시켜 주었다.


나는 민족문제로 ‘남북통일’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그리운 금강산’으로 했을 정도이다. 앞에서 내가 경험한 정체성 혼란의 문제는 심리적 자존심도 상하게 한다. 밖에서 보는 한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엄연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이 갈라진 것은 우리 민족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 슬프게 한다. 70여 년이 넘게 혈육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8만 이산가족의 애통함도 인지상정으로 가슴 저린다.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은 황해도 은율이 고향이다. 열세 살 때 고향을 떠나 온 지 80여 년이 넘는다. 내가 북한산 언저리 기자촌에서 살 때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종종 산책길에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그때만 해도 고령임에도 정정했다. 지금은 노환으로 병원에 계신 것으로 안다. 한겨레신문 이중근 논설위원이 선생을 찾아가 마지막 소원을 물었다.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어.”


그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 산소라도 가고 싶다는 소원이다. 그 그리움이 얼마나 클지 가늠하기 어렵다.


서리가 내리고 가을 농사가 끝나간다는 상강 다음날 민간인통제선 안에 들어갔다. 파주시중앙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파주 DMZ 판문점 JSA 여행학교’ 일정이었다.


도라산 전망대, 도라산역, 덕진산성, 허준 묘, 해마루촌을 둘러보았다. 진행자 포함 40여 명이 함께 했다. 통일대교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확인 절차가 있었다. 군인이 우리가 탑승한 버스에 올라와 신분증과 실제 얼굴을 확인한다. 민간인통제선에 들어선 일행을 태운 버스는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의식이라고 치르듯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손에 잡힐 듯한 개성과 송악산, 남북의 국기가 게양된 것 등을 볼 수 있는 도라산 전망대로 갔다.


북녘땅을 바라보며 안내 방송으로 30여 분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들은 후 망원경을 통해 보다 자세히 북녘을 들여다봤다. 송악산 아래 개성이 아스라이 보이고, 개성공단과 숙소, 차령산맥과 그 산맥 어디쯤 있을 박연폭포가 보이는 듯했다. 또 북한의 대정동 마을과 그곳에 우뚝 솟은 인공기, 비무장지대, 판문점 언저리, 남쪽 최북단 마을 대성동 마을과 그곳에 펄럭이는 태극기 등도 보였다. 인공기와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게양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내 휴대전화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호주머니와 가방 속 여기저기를 찾아봐도 없다. 아무래도 안내 방송을 들었던 장소에 떨어져 있을 것 같아, 그곳으로 가봤다. 앉았던 자리와 그 주변을 샅샅이 찾아봐도 없다. 일행이 떠나는 시간이 되었다. 사정을 얘기하고 전망대에 근무하는 분들과 일행 몇 분이 함께 찾았다. 그래도 없다.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일단 버스에 탔다. 자리에 앉아 혹시 하고 가방 안쪽에 깊숙이 손을 넣어보았다. 그토록 찾았던 휴대전화가 거기 있는 게 아닌가. 카메라를 넣으려고 평상시 잘 사용하지 않는 큰 가방을 들고 왔었다. 휴대 전화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20여 분 동안, 다급하고 황망한 마음이었다. 나는 고작 20여 분 동안이었는데, 70여 년이 넘게 혈육과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 심정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제쯤 이들의 한스러움이 풀어질 수 있을까? 나라 안팎으로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안쪽으로 봐도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더구나 밖으로는 강국들이 우리의 분단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착화하려는 의도도 있다. 백기완 선생은 말한다.


“허리가 두 동강 난 사람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격이야. 분단의 고통은 다 잊고 눈앞에 닥친 현실만이 최우선 고통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 분단 70년을 보내니 그 현실을 당연시하고 그 안에서 굶어 죽지 말자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어. 자그마한 개인적인 손해에는 화를 벌컥 내면서도 공동체를 위협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거든. 이걸 식민지 의식이라고 하는 거야(백기완 선생의 마지막 소원. 한겨레신문 2019년 9월 20일).”


2000년 유학 중 동경에서 2000년 남북 첫 정상회담에 동행했던 강만길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강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문제가 잘 풀리려면 20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2000년으로부터 20년이면 바로 올해 2020년이다. 아직 남북통일은 멀게 느껴진다. 그래도 민족이 가야만 하는 길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처럼 한민족이 오고가는 날을 위해서는 종전선언, 평화협정, 더 나아가 평화통일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1987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자리에서 들었던 문익환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번 민통선 방문 중에도 최북단 역인 도라산역에서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들었다.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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