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먹으렴. 처음 먹어보지?”
중학교 시험을 치르던 날, 아버지가 짜장면을 사주면서 나에게 한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짜장면이다. 나는 읍내에 있는 여자중학교에 다녔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할 무렵, 부모님은 내 위로 오빠 둘을 학교 보내느라 벅차셨다. 무엇보다 집에는 현금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학교에서 필요한 돈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면, 부모님은 이웃집에 가서 돈을 빌려오셨고 그 내용을 수첩에 적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보게 된 수첩에는 빌렸다 갚은 목록이 스무 장이 넘었다.
이렇게 돈을 빌려 자식을 가르치기 힘드셨는지 아버지는 내가 1년만 쉬었다가 중학교에 갔으면 하셨다. 이를 아신 선생님이 부모님을 설득하셨다. 덕분에 나는 쉬지 않고 바로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1년만 쉬었다 학교에 가라고 했던 아버지가 중학교 시험을 치른 딸을 마중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십리 도로 길을 자전거를 타고 와서 교문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시험을 치르고 나오자 ‘고생했다.’라고 한 말씀 하시고 읍내에 있는 짜장면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처럼 맛있는 짜장면을 아직 먹어본 적 없다. 오래된 기억으로 중국집의 풍경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중국집 탁자에 단둘이 마주 앉아 짜장면 먹었던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쫄깃한 면발과 양파향, 노란 단무지가 입안에서 ‘오도독’ 소리를 내며 씹히던 맛이 또렷하다.
중학교 입학 후 내가 돌아올 시간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마을 어귀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며 나를 기다리셨다. 학교를 마치고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든 나는 자갈이 깔린 도로 가장자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가끔 차가 지나가면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오일장 날이면 소달구지들이 유기그릇, 밥상, 이불, 옷, 먹거리를 싣고 가던 신작로였다.
마을 가까이 가면 의자도 없는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등이 휜 아버지 모습이 멀리서도 보인다. 지금 생각하면, 뛰어가서 아버지 목을 얼싸안고 기뻐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런 표현을 잘 못 하는 아이였다. 내가 아버지 가까이 가면 아버지는 ‘왔냐?’라고 한 말씀만 하시고, 양손을 허리에 얹어 뒷짐을 지시고 앞장서서 마을 골목길로 걸어가신다. 나도 말없이 아버지 뒤를 뒤따랐던 기억이 아련하다.
아버지는 집안 제삿날이면 한 손에 제사상에 올릴 맷밥을 지을 쌀자루를,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친척 집을 찾아다녔다. 큰 할아버지네는 ‘배날리’ 불리는 곳이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신작로 길을 걷다가 덕진다리가 놓인 내를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야 했다. 작은 할아버지네는 ‘장등리’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몇 개 마을을 지나 산길을 걷고, 언덕을 넘어서야 있었다. ‘서리등’ 외갓집에도 자주 갔다. 외갓집은 도깨비가 나온다는 숲길을 지나고, 저수지 둑을 지난 후 내를 건너야 있었다. 걸어서 두 시간은 족히 걸렸던 곳이었다. 외갓집에 도착하면, 하얀 모시옷을 입으신 외할버지와 늘 따뜻했던 외할머니가 반겨 맞아주셨다.
제사뿐 아니라 집안 대소사에도 아들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꼭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아들 다섯 가운데 딸 자식 하나가 마냥 귀하고 사랑우셨나 보다. 내 기억에는 없는데 어머니가 들려주는 얘기가 있다. 아들들은 아파도 별 신경을 쓰지 않으신 분이, 내가 마당 처마 밑을 건너다 발을 삐었을 때는 잽싸게 등에 업고 오리 길을 한숨에 달려가 뼈를 맞추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따스함만 남기고 떠나셨다. 내가 현해탄 건너 유학하고 있던,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5월 어느 날, 하늘의 별이 되셨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현해탄에 눈물을 뿌리며 귀국했었다. 버스를 타고 고향에 도착하면 차가운 곳에 누워계실 아버지를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지, 내 무의식이 나를 강남고속버스 지하도를 서성이게 했다. 버스를 타고 어떻게 고향에 도착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읍내 병원에 도착 후, 나는 아버지 얼굴을 매만지며 울면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끝내 대답이 없으셨다. 꽃과 음악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현해탄에 눈물을 뿌리며 동경으로 돌아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한동안 머나먼 타국에서 길을 걷다가도, 공부하다가도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늦게까지 공부만 한다고, 맛있는 식사 한 번 제대로 사드리지 못한 게 못내 한스럽다. 요즘도 운전하다가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 어버이날이나 명절 때면 더욱 더 보고 싶다. 그럴 때는 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아버지, 아버지······.’라며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다. 내 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흰 쌀밥에 좋아하신 멸치젓갈을 올려드리고 싶다. 아,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