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봄_.
학교를 입학하면서 줄곧 외로웠던 2년이라는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혜인이를 만나고 즐거워졌다. 늘 따라다니던 말더듬이, 말도 할 줄 모르는 거북이라고 놀림을 받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나고 삐뚤어져서 세상 지루해하던 표정도 조금씩 달라져 간다. 혜인이는 반에서 은근히 인기가 많은 편이다. 혜인이는 차렷 자세를 했을 때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항상 동그랗게 말린 앞머리를 하고 웃는 모습이 예뻤다. 옅은 분홍색을 좋아하고 하얀 카라가 달린 무릎길이의 원피스를 좋아했고 자주 입었다. 나와 친해질 거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혜인이었다. 우리 엄마도 답답해하는 내 말을 잘 들어줘서 늘 고마웠다. 속마음은 고마운데 겉으로 표현하는 건 모나고 서툴러서 자꾸만 퉁명스럽게 나갔다. 같이 도시락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잠시도 쉬지 않고 쫑알쫑알 떠들었다.
벚꽃 잎이 떨어지면서 바람이 부니 별다를 거 없었던 운동장도 예쁘게 보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3~4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로 가깝다 보니 맨날 혜인이와 같이 우리 구멍가게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놀았다. 엄마도 혜인이를 예뻐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반대로 내가 놀러 가면 혜인이 어머니께서 챙겨주시고 예뻐해 주셨다. 놀러 갈 수 있는 친구 집이 생긴 게 신기하고 감사했다. 우리 집 구멍가게 반대편에는 문방구가 있는데 우리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한 명이라도 동전이 있으면 둘이 오락실에 가서 ‘보글보글’을 하면서 서로 좋은 걸 먹겠다고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친구랑 같이 백 원짜리 1~2개 들고 가서 정신없이 즐기는 오락의 중독성은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
그런 면에서 혜인이와 난 잘 통했다. 게임 취향도 그렇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한다는 점에서 잘 통하고 재밌게 놀았다. 가끔 동전이 생기는 날이면 ‘보글보글’을 하러 갈 생각에 신났다. 게임이 끝나면 가게 안쪽 방에 들어가서 공기놀이를 했다. 문방구에 가면 종이 인형 한 장씩 사서 옷 입히는 것도 좋아했고 고무줄놀이도 좋아했다. 공기놀이가 지겨울 때면 스케치북에 사람 그림과 맞는 옷을 그려서 색칠하면 가위로 오려서 종이 인형 옷을 입히면서 놀았다. 둘 다 원피스를 좋아해서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면 무조건 치마를 입혔다. 말이 서툴러도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알아채 줄 때는 신기할 정도로 잘 맞혀서 신기했던 적도 많았다.
다음 날, 담임 선생님께서 짝꿍을 새로 정하기 위해 자리 뽑기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같이 있는 짝도 답답해하고 싫어했는데 또 바뀌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됐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플라스틱 상자에서 쪽지를 뽑았는데 교실 가운데에 있는 자리가 뽑혔다. 구겨진 포일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면서 뽑힌 자리에 갔는데 옆자리에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정확한 발음이 나왔다. “혜인이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혼자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혜인이도 놀란 토끼 눈을 하더니 금세 방긋 웃어주었다. 수업시간이 즐거워진 것은 혜인이와 짝꿍이 되고 난 뒤부터였다.
국어나 사회 시간이면 선생님께서 번호를 불러서 책 읽기를 시키셨는데 꼭 재수 없게 내 번호가 걸릴 때가 많았다. 말하는 것만 더듬으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1학년 때부터 더듬거리면 선생님께 책 읽는 꼬락서니가 왜 그러냐며 혼났다. 그럴 때마다 모나고 울퉁불퉁 우울의 끝자락을 기어 다녔는데 혜인이와 친해지면서 책 읽는 문제가 조금씩 개선되었다. 처음보다 발음하는 게 좋아지면서 선생님께 혼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열 번 혼날 일이 여덟 번으로 줄고 다섯 번으로 줄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국어와 사회 시간도 즐거워졌다. 말 더듬는다고 무시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끝까지 들어주고, 답해줘서 혜인이에게 말하는 건 긴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혜인이와 같이 있으면서 성격도 점차 밝아졌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에도 봄이 온 것처럼 즐거웠다. 혼자 도시락을 먹지 않아도 되고, 못 먹고 집에 가져가서 몰래 먹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행복했다. 서로 짝이 되면서 함께 하는 시간도 늘었다. 필기 노트도 빌려주고 학교가 끝나면 집에 놀러 가서 숙제도 같이하곤 했다. 혜인이와 친구가 되면서 다른 아이들이 놀리거나 말 못 한다고 놀림받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항상 풀꽃이 많이 피어있었는데 클로버 꽃이다. 둘 다 클로버 꽃을 좋아해서 같이 꽃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꽃반지도 만들면서 놀았다. 별거 아닌 놀이에도 까르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봄은 즐거움 속에 싱그러운 봄꽃이 함께 지나갔다. 처음 생긴 친구는 내가 마음을 열게 해 준 활짝 핀 들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