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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제니 Mar 18. 2023

타고난 것, 비밀의 열쇠

나이 43에 점점 확신을 가지게 되는 사실 하나.


타고난 것이 비밀의 열쇠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담, 영웅담들.

근성을 배울 수 있다거나

훈련하면 공부머리가 깨인다거나

소위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 기를 수 있다는 믿음들


또는 어떤 환경과 경험 때문에

그 사람의 어떤 특성이 억압되어서 뭘 못하게 되었다라는 경험담들


가령,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고 능력을 제대로 펼칠 기회를 못얻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어렸을 때 선생님이 핀잔을 줘서 살인자가 되었다고 합리화하는 강호순 같은 작자들


여러 다양한 사례를 접하다보면

각 사례별로 수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이 고개를 든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억압을 받아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동기부여의 자양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논리가 된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창의적이고 자존감 넘치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사람으로 자라고

누군가는 안하무인, 고생 모르고 자라서 노력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자란다.


같은 집에서 자란 동일 환경의 비슷한 유전자를 타고난 형제들 사이에서도

성향과 인생 전반이 많이 갈리는 경우가 꽤 있다.


도대체 뭐가 맞는 것일까,

아이를 좀 잘 키워보고 싶은 엄마 마음 입장에서는

솔직히 혼란만 가중된다.


'모든 것이 선천적이다.'

태어날 때 이미 결론이 다 난 것이라는 정언명제에 갇히면

모든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해진다.


수십년 교육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다루면서

내가 아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보다

타고난 부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경험적 진리만 강화된다고 고백한 한 초등교사의 글을 보았다.


교육현장에서 간증되는

'정말 타고난 대로 가더라'라는 힘빠지는 귓속말이 암암리에 전해지는 현실

하지만 그들이 오늘도 힘내서 일하러 나가는 이유는

'그래도 인간은 교육의 힘으로 변화한다'는 믿음과 소신 때문이며,

그것이 현대 교육학의 신앙이다.


인간은 어차피 세뇌를 잘 당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선천적 부분이 어쨌건 간에

후천적으로 뭐든 바꿀 수 있다고 교사를 세뇌해놓으면

교사들이 학생과 학부모를 세뇌해 나가고

그 세뇌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정말 많이 변하는 학생들도 가끔 나오고

조금씩은 살짝살짝 변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추세가 생기게 되는 원리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는 잘 될 수 있다. 나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마음에 품게 되기는 하니까.

그런 마음 속의 작은 씨앗은

늘상 나태하고 게으르고 놀고 싶은 우리의 마음 한켠에서 스스로를 관리감독하는 잣대로 작용하니까.


서울대를 나온 어떤 사람의 글을 읽었더니

자기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부를 잘했다고 믿고 있는 흐름이 읽혀졌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 엄마가 책을 많이 읽어주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양육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흐름대로인 듯 보인다.


허나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은 머리가 좋은 기본 토양을 가지고 태어났기 문에 저 흐름이 순리대로 간 것이다.


나도 서울대는 아니지만 공부를 꽤 잘한편이었으며,

당연히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잘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확실히 틀렸다는 것을 30대 중후반부터 확실히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공부머리가 좋은 것이었다.

내가 수퍼천재, 완전 잘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때 그 공부를 그만큼 잘할 수 있을 만큼만 머리가 좋은 것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노력이 덧붙여진 것일 뿐.

그리고 그 노력이라는 것도

성과가 있으니까 재미와 탄력이 붙어서 계속된 것이지

결과나 보상이 없었으면 그 놈의 잘난 노력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령 내 머리의 수준은 이렇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공부 중에서 '어렵다'고 느껴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공부는 쉬운 것이었고, 그래서 즐겁고 재미있었다.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가 항상 좋으니 즐겁지 아니할 이유가 있겠는가.

늘 올백만 맞았다는 것이 아니다.

시험에서 뭔가 틀렸던 것은 어려워서 못풀었던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을 못봐서, 몰라서 틀렸던 것들이다.

공부가 안됐던 부분을 틀린 것이지, 공부를 하고도 이해가 안가거나 어려워서 틀린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더욱 공부를 '노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안본 부분이 없게, 다 보고 다 훑고 시험을 보면 빈공간이 없어지니까 그만큼 문제를 틀릴 확률이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시험공부를 '완벽하게'하는 데에 집중했고, 이 전략은 먹혔다.


공부를 '중요한 것'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중요한 것까지 빠진 부분 없이 완벽하게'하는 데에 집중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의 공부에는 '노력'이 수반된다.


그런데 어른되고 아이를 키우다보니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지식들을 한번 '보면' 곧 '아는 것'이라는 패턴으로 공부해왔었는데

내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집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이해'를 못한다거나, 아무리 반복해도 '모른다', '어려워서' 하기 싫어한다라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해'부분부터 막히는데, 암기나 응용이 될 리가..


그러던 중 친구와 우연히 나눈 대화

'나는 수업에서 열개를 배우면 9개는 날아가고 1개만 남아. 9개는 이해를 못해. 그래서 나는 엉덩이 힘을 가지고 계속 앉아 있으면서 나머지 9개가 이해 될 때까지 시간을 계속 써야 해.'

나는 이 말이 정말 충격이었다.

수업에서 뭔가를 듣고 이해가 안간 경험이 한번도 없는 나는 10개 중 9개가 날아가는 그 느낌과 기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세상의 지식들을 '접하면' 곧 '아는 것'이 되는 패턴으로 살아온 나는

가끔 이해가 안가는 '현상'을 접할 때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파고들어 결국 이해해내는 근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 나의 근성도 근성이지만

이해가 안가는 현상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파고들 여력과 시간이 남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럼 역으로 다른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지식들을

접하고도 모르거나 이해가 안가는 채로 그냥 두고 살아간다는 뜻인데,

심지어 그것들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편안하다면

더 노력해서 공부해서 굳이 그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욕심이나 근성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대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수업(설명)을 듣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없었다.

수업에 안나온 부분들 중에서 내가 놓쳐서 문제를 틀리는 식이었거나

그 부분을 공부할 때 뭔가 착각이나 오해가 있었거나

잘못공부한(?) 경우였다.

처음보는 내용들도 80-90% 정도는 '쉽구나'하는 느낌으로 공부하면서

10-20% 정도를 '요 부분은 중요한 거 같으니까 완벽하게 외워질때까지 계속 보자'라는 식으로 대했다.


'어렵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부분은 극히 드물었다.

그게 수학이라 할 지라도.


(일단 공부할 양이 많으니까 놓치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내가 늘 완벽한 만점 학생이었다는 것이 절대 아니니 읽으시면서 오해 없으시길

그리고 서울대 갈만큼 노력을 많이 한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겨우 나 정도 머리 좋은 사람도 이렇게 사는데

나보다 더 머리 좋은 수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세상을 쉽고 재미나게 살 것인가

그 세계가 나는 무척 흥미롭고 궁금하다.



요는, '노력'이라는 것도

거의 채워져있는 항아리에 '조금만 더 하면 다 채울 수 있어'라는 희망이 보일 때 스퍼트를 내는 것이지

밑빠진 독에 물붓는 상황에서 '즐거운 노력, 성실한 노력'이 얼마나 가능하겠냐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서 나는 '강요'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 그릇만큼 할 수 있다.

부모는 그저 '조언자'다. 방향을 제시해주고, 아이의 기를 꺾지 않는 것만으로 족하다.

한편으로 자기 항아리가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 정확히 알게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같다.


위에 언급한 내 친구는 자기가 머리가 나쁘다면서

자기처럼 머리가 나쁘면 노력밖에 없다고,

그런 현실인식을 시작으로 노력에 대한 무한한 동기부여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실제로 머리가 나쁜지 어떤지는 모른다. 친구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



지능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생각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을 하는 것 같다.


우리의 교육은 때론 '지능계발'과 '창의력증진'이란 말로 포장된다.

그런 말들은 90% 거짓말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변화시키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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