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하루종일 충분히 돌봐주었던 유년기였지만 저는 하루종일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에 몇번이고 수시로 '엄마 언제와요?'라며 할머니에게 묻곤 했습니다. 엄마가 돌아와서 딱히 뭘 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도 기다렸습니다. 할머니는 늘 '조금만 기다리면 온다'고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된 제 입장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퇴근 후 엄마의 일상은 참으로 부럽습니다. 할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놓은 집, 아이들의 끼니가 완벽하게 해결된 후 뒤늦게 집에 돌아와서 '피곤하니 이제 엄마 쉰다'고 선언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평온한 저녁시간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프고, 하루종일 떠들어서 목이 아픈, 제가 한 20여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이란 직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천번이나 반복되는 기다림을 해보고도 깨닫는 게 없었는지, 저는 엄마가 저녁 늦게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그저 매일매일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6시 이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돌아올 수 없는 엄마였건만, 무슨 근거에서인지 늘 '조금만 기다리면 온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온다'는 기다림을 완전히 끝낸 것은 9살 여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9살이면 시간에 대한 개념도 알고, 시계도 볼줄 아는 나이입니다. 그 날도 엄마가 조금만 기다리면 올 것 같아서 동네 입구까지 나가서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걸어올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훤히 밝았을 때부터 앉아서 기다렸으니까 한 서너시간 정도 인도 턱에 걸터앉아서 엄마를 계속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6시에 온다고 했으면 5시 50분부터 나가 있었으면 될텐데 혹시나 엄마가 빨리 올지도 모르니까 3-4시부터 나가서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화장실에 갈 동안 엄마가 올까봐 화장실도 참으면서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았습니다. 6시에 온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휴대폰도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중간에 연락해서 왜 안오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덧 시계는 6시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너무 앞서서 기다렸던 시간까지 합치면 너무 긴 시간을 기다렸던 것이기에 저도 많이 지쳤습니다. 그리고 왠지 더 기다려도 안 올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린이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젠 집에 가야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한테 '엄마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왔어요..'라고 말하며 쓸쓸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앞으로는 절대 엄마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루종일 엄마가 언제 오는지에만 집중하고 있던 제 유년기의 삶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내 할일을 하다가 엄마가 오면 오나부다 하는 삶을 살겠다는 태세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엄마는 정말 늦게 들어왔습니다. 왜 늦었냐고 물어보니 학교에 일이 있었고 바빴고 어쩌고 하면서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핑계를 댔습니다. 계속 안기다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훨씬 전부터도 엄마는 양치기 소년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오늘은 일찍올지도 몰라'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실날같은 희망을 마침내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마음의 단도리를 지어야 앞으로 내가 상처받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은 현실인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제 유년기가 끝나는 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아이의 심리상태를 제대로 잘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이성적 사고를 잘 못하기 때문에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올 리가 없는 엄마를 혼자 계속 기다리고 혼자 상처받는다는 것인데요. 애들은 다 그렇다는 것이죠.. 이제나저제나..혹시나..하며 엄마를 기다립니다. 현실인식이 제대로 안되고 있고 시간개념도 자기 위주이고요. 그게 제대로 되면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봐야겠죠.)
하루종일 엄마를 기다리는 소모적인 인생대신,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니 그럭저럭 또 괜찮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에 와서 책도 읽고, 가끔 친구집에도 놀러가며 나 혼자만의 하루하루를 살 수 있었던 몇달 간이었습니다. 열살이 되고 너무 연로해진 할머니가 큰아빠네 집으로 가시게 되면서(지금까지는 독박 살림+육아, 큰아빠네 집에 가서 며느리의 봉양을 받는 입장) 저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친구를 기다리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번 삶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고요. 저희집이 학교에서부터 가장 멀었기 때문에 매우 일찍 일어나서 학교로 출발했어야 했는데요. 일단 아침 등교 시간부터 친구집 앞 대문 앞에서 친구가 나올 때까지 친구를 기다립니다. 혹시나 제가 늦으면 친구가 먼저 가버릴까봐 더욱 더 일찍 준비를 해서 친구집 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한 친구를 기다려서 같이 걸어가며, 중간에 나오는 다른 집 친구집 앞에서 그 친구를 함께 기다려서 같이 가고,, 그런식으로 4명이 같이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끼리 같이 놀기로 약속을 합니다. 집에 가서 가방만 내려놓고 바로 나오기로 철썩같이 약속을 하는데, 왠일인지 아이들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폰이 없던 시절이라, 먼저 나가 기다린 사람은 상대아이가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서 나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다가 나도 집에 돌아갈까 하다가 내가 돌아서자마자 친구가 나와서 나를 기다릴까봐 몇십분이고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한참만에 밖에 나온 친구는 이것저것을 하고 나오느라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합니다. 제가 듣기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아이들이 하나같이 그저 시간개념이 별로 없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아이들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를 키워보니, 그 아이들이 왜 그랬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텅빈 집에 혼자 들어갔다가 바로 몸만 빠져나왔던 저와 달리, 친구들은 집에서 맞이해주는 가족이 있었고, 간식도 챙겨주고, 옷도 갈아입혀주는 등 저처럼 바로 나가지 못하도록 엄마들이 무언가를 해주었던 것이었겠죠. 집에서 엄마가 기다렸던 아이들은.. 가방만 던져놓고 바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친구들 엄마는 허구헌날 자기 자식을 불러내는 아이의 친구들이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저만 제외하고요. 만나서 놀아봤자 도움 안되는 공부 못하는 친구들말고, 저 같이 공부 잘하는 친구랑만 어울리라고, 저 듣는데서 말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저도 사실 그 친구들에게 별로 도움되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괜시리 그 엄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싸한 기분이 듭니다. 제가 공부조차 잘 못하는 아이였다면 저는 친구도 없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요?
이런 의문도 있었습니다. 저는 왜 공부잘하고 반장부반장을 하는, 소위 케어가 잘되는 친구를 전혀 사귀지 못했을까하는 의문이요. 보통 공부잘하고 잘사는 애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던데, 저는 늘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친구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 20여년간, 제가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앉아서 뒤에 앉아있는 아이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업맘이 되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 친구관계가 엄마들 관계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 까닭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는 친구들도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공부잘하고 케어가 잘 된 애들끼리는 애초에 엄마들끼리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이 깁니다. 같은 반이 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경우가 많고, 그룹수업을 같이 받거나, 학원을 같이 넣는 등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도 아이들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30대 초반에 어떤 친구로 부터 전해 들었던 적이 있었고, 이제는 제가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되어 20년간 풀리지 않았던 친구관계의 매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일단 자기 마음대로 친구를 사귀지만, 엄마가 보기에 그 친구가 마음에 안든다면, 아이에게 그 친구와 놀지 말라거나, 또는 어떤 친구와는 놀아도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엄마의 말에 영향을 안받는 아이도 있겠지만, 엄마 말을 따르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겠죠. 알게 모르게 아이들의 친구관계는 엄마의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허구헌날 아이를 불러내서 저녁늦게까지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던 아이였으니, 친구들 엄마들은 제가 너무 싫었을 수도 있겠네요.
아침 일찍부터 친구를 기다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 늦게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고..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마가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할 이야기..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하루종일 기다림에 지쳐 마음을 다친 아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할 이야기.."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 어쩌고 저쩌고 핑계를 대고 합리화를 시키기보다..하루종일 기다리느라 힘들었던 아이들에게 가장 위로되는 말 한마디부터 먼저 해주세요.
"오늘 뭐하고 놀았어?"하며 아이 이야기부터 들으려 하기 보다.. 아이가 하루종일 했던 '기다림'에 대해 공감부터 해주세요.
<+> 어제 저희 집 창고를 정리할 일이 있어서 지하에 내려가서 30-40분 일을 하다 집에 왔습니다. 준이는 당연히 아빠가 놀아주고 있었고, 날 밝을 때 나갔다가 날 밝을 때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자기 전에 잠자리에 누워서 준이가 '아까 엄마가 창고 정리하러 갔는데 너무 오래 있다 와서 나랑 안놀아줘잖아..'라며 원망을 하더군요. 바로 '미안해. 많이 기다렸구나'하니 울먹울먹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기다림에 대한 인내심이 약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합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 밖에 없다면, 그 마음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노력을 해주세요. 생각보다 많이 위로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