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서의 나, 그리고 원래의 나

by 스윗제니

부모노릇 8년차에 접어들었다. 현수준에서 점검해본 '부모로서의 나'는 어찌보면 굉장히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 내가 받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자식에게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받지 못하는 것들까지 싹싹 닦아서 아이에게 내어주고 있으니까. 내 아들은 그야말로 이데아적인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이면 물질, 부모와의 시간이면 시간, 교육이면 교육, 가정교육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근 8년간 나는 '원래의 나'를 거세한 채 살아오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부모로서의 모습이 완벽해지면 질수록 자연인으로서의 원초아는 눌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눈 뜨자마자 아이를 위해 돌아가는 나의 일과와 시간표. 이를 지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부모로서의 정신세팅. 그래서인지 '원래의 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되짚어보는 일조차 어렵게 느껴진다. 어렴풋하고 아련한 과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연인인 한 여성이 엄마로의 완전한 변태를 꾀하려면 필연적으로 돈과 시간이 소요된다. 주요 일과와 여가시간이 모두 아이에게 종속되며, '나'를 위해 쓰여졌던 대다수의 자금도 아이 중심으로 쓰임의 구조가 재편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엄마가 쓸 수 있는 돈의 범주는 '먹는 것' 외에는 극도로 제한된다. '쓸모'가 없어지며, '돈을 사용할 시간'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먹는 것도 내 위주가 아니다. '얻어먹는 정도'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소위 취미생활이라고 이름붙여질만한 모든 활동들은, 그것들을 영위할만한 시간이 제한되기 때문에 쓸모 없어지며, 자기관리라고 불리우는 소비들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절약된다. 엄마란, 먹고, 숨쉬고, 자는 것만이 허락되는 존재가 아닐까.


바르고 나갈 데가 없어진 화장품들은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있고, 기초화장품들은 아이의 로션을 얻어쓰는 것으로 갈음한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랬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고 나갈 데가 없어진 옷장 속 원피스들은 좀이 슬기 직전이라, 소장용, 전시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요, 대충 틀어올려 몇일째 감지 않는 머리는 남편과 공용으로 쓰는 마트 행사용 샴푸에 열심히 적응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자연인으로서의, 한 사람으로서의, 여성으로서의 나는 이토록 비참한데, 부모로서의 나는 눈이 부시도록 빛난다. 아이와 더없이 튼튼한 관계, 아이로부터 단단한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찬란한 나. 이 정도면 신격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이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감을 빛낼 수 있는 지금의 나는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힘겹게 억압해 얻은 결과다.


밸런스, 밸런스라고 다들 외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나에게 밸런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처참히 부서진 결과물이 이보다 더 뿌듯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 본래적 자아를 지켜내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부모로서 얻게 된 새 자아에 적응하고, 그 나름의 성취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새로 부여된 자아를 연마하고 노력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왜냐면 아이를 기름으로부터 분명히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인격의 성숙, 인생의 보다 고차원적인 성취, 확실한 존재감, 이 세상 가장 깊은 유대감 형성.. 이런 것들은 내 개인적인 자아만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인생의 과제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자아 획득 과정에 투자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또 한편으로, 전폭적으로 투자될수록 총기간은 짧아지는 묘미가 있다. 대략 10년 정도 부모로서의 인생에 올인을 하면, 그 이후 과정이 쉽고 가볍다. 소위 부모로서 가장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사춘기를 쉽고 편하게 넘길 수 있게 되고, 아이와의 공부 전쟁에서 언제나 위너로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10년에 걸쳐 다져낸 부모로서의 존재감 덕분이다.


그 이후엔 비로소 나로 돌아온다. 청년이 끝난 시점의 나, 자연인으로서의 나, 여성으로서의 나를 다시 키울 때가 되돌아온다. 중년으로서의 나는 어린시절의 나와 꼭 같을 필요는 없다. 인격의 성숙도와 연륜이 다르고, 사회배경도 달라졌기에 영유할 수 있는 자원의 종류와 수도 이미 10년전의 그것이 아니다.

자아성숙.jpg


무엇보다도 중년의 새로 얻은 내 자아는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완벽히 보존하고 있는 모습이기에 더욱 편안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 캐치프레이즈가 중년을 받아들이는 나의 신념이 될 것이다. 인생의 한바퀴를 돌려보고 다시 맞이하는 새로운 한바퀴의 내 인생. 오롯이 나 하나에 대해서만 다시 고민할 수 있는 무수한 시간들. 그 기회를 감사하게 받고, 조심조심 더듬어보려고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얼마면 다시 나가 일할 생각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