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맘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한번씩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애를 몇살까지 키워놓고 다시 일을 할까?
사회생활 경험이 별로 없는 엄마들까지도 입을 모아 그어대는 상한선이 바로 '3학년'이란 숫자입니다. 제가 워킹맘의 아이 시리즈에서도 언급했던 10살이 되겠네요.
아이가 10살이 되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근거는 '아이가 스스로 학원을 왔다갔다할 수 있는 나이' 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고,
이 공평한 시간을 가장 값어치있게 쓰고자 하는 마음은 전 인류공통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현대인은 시간을 가장 값어치있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가치를 좇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간을 써서 돈을 버는 활동이야말로 최고의 값어치 있는 활동이라는 논리적 전개를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학원을 왔다갔다할 수 있게 되면 더이상 엄마의 존재가치가 의미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돈을 버는 활동이 더 의미있고 값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뭘까요?
확실히 10살이면 엄마보다는 친구를 찾을 나이이기도 하고,
여러군데의 학원을 다녀야 하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이가 10살이 되면 엄마가 아이에게 '물리적'으로 해줄 일은 거의 없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왜 이렇게 비어있을까요?
혼자 할 수 있으니 정말 혼자 하게 두면, 그 아이는 엄마로부터 받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엄마에게 고마움이나 감사함을 느낄 근거는 희박합니다. 아이도 관계를 계산하고 따질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이에 대해 애정의 권력을 갖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됩니다.
아이가 갑자기 공부를 때려치고 부모가 탐탁치 않아하는 제 3의 길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부모의 말이 안먹힙니다. 왜냐. 아이에게 해준 것이 없으니까. 또 왜냐. 아이 스스로 그렇게 말하니까요.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야
대부분 이런 상황에 봉착하면 '엄마가 너 학원비 대려고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 줄 알아?'가 다음으로 등장하는 레파토리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받아칩니다.
누가 학원 가고 싶다고 했어? 엄마가 보내고 싶어서 보낸 거잖아.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책이나 미디어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청소년' 관련 글이나 영상에서 99% 동일하게 보여지는 패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기억들은 '종합기억'이라는 형태로 남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개개의 모든 기억들을 종합해서 가장 지배적으로 나타났던 모습을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나 종합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애정의 권력이란, 다른 말로 하면 애착입니다. 애착이론은 다들 한번씩 들어보셔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애착은 아이와 함께 특별한 활동을 하고 특별한 기억을 줘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와 함께 있어주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길러질 수 있습니다. 애착이 깊어지면 부모는 애정의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의 생각과 가치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내 맘대로 좌지우지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엄마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해줬고,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니까, 엄마가 해주는 말은 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일 거야'
라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상태. 이것이 애정의 권력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에 대해 판단하지 않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서 머리가 굵어지면 자기들 스스로도 부모에 대해 판단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엄마는 어떤 엄마고, 우리 아빠는 어떤 아빠라는 '종합기억'과 '판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10살 이후의 기억은 '부모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근거로 가장 크게 작용합니다.
기억도 보다 생생하고, 아이의 판단력이 더 많이 길러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가장 공을 들여야할 사춘기 때
대부분의 집에서는 아이가 혼자 학원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게 내버려 둡니다.
저와 제 동생, 사촌동생의 사춘기시절을 돌아보면
엄마의 존재감이 돈과 큰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워킹맘이어서 아이들이 필요한 물건을 직접 사주지 못하고, 밥을 제때 못차려주니까
엄마들은 언제든 필요한 물건을 사게 돈을 달라고 하면 그대로 돈을 줬습니다.
엄마에게 기대할 것은 돈이 가장 컸습니다.
엄마와의 시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보다는 친구가 더 좋았고, 의미있었고, 집안일이나 공부는 어차피 내가 알아서 하고 있었기에 엄마의 도움이 필요 없었죠.
엄마란 사람은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엄마들이 자기입으로 너를 키우기 위해 힘들게 돈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식이 자기를 돈줄로 생각하면 기분나쁘고 불쾌합니다. 잘못된 단추는 엄마입에서 나온 말이겠죠. 너때문에 힘들게 돈번다는 말은 자식에게 전해져서는 안되는 말입니다. 엄마가 돈벌기 때문에 아이는 혼자있고 혼자밥사먹고 혼자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돈이 모든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엄마의 역할을 학원비 버는 역할로 한정시켜서도 안됩니다.
엄마가 지키고 있지 않은 빈집은 언제나 친구들의 아지트였고,
친구들은 우리집에서 뭐든지 하고자 했습니다.
자기들 집에서 하지 못하는 모든 제약들이 우리집에서는 다 자유였죠.
우리집에 와서 전화를 마음껏 쓰고
우리집에 와서 마음껏 게임을 하다 가고
우리집에 와서 냉장고를 마구 뒤져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여기까지가 기본이고
나쁜 짓 못된 짓을 하자는 아이들의 유혹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날나리였고, 우리집이 비어있었다면
비행청소년들이 저지르는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렀을 것 같네요.
실제로 다른 친구의 빈집은 말 그대로 비행청소년의 아지트가 되어서
매일 술판이 벌어지고 너구리굴이 되고
남자친구를 불러들이고 난리도 아니었으니까요
비행청소년들이 거리의 아이들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 아이들이 1차로 찾는 곳은 부모님이 없는 빈집입니다.
아무리 비행청소년들이라고 해도 일단 돈이 넉넉치 않아요.
술집에 가서 비싼 돈을 내고 술을 먹기보다
비어있는 친구집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다가 먹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니까요.
아무리 거리의 아이들이지만 거리보다는 빈집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니 집에 있는 엄마는 할일 없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정신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행동의 제약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엄마가 없는 공간에서는 아이의 자율성이 극대화되는데,
좋은 쪽의 자율성보다는 안좋은 쪽의 자율성과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엄마가 없는 빈집에서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많을까요,
아니면 야동이나 보고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의 숫자가 많을까요?
아이가 10살이 되었다고 해서 엄마가 해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로 의미있고, 존재 자체로 아이들의 내적기준의 역할이 됩니다.
저는 엄마의 손길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라서
남들이 엄마한테 받고 자라는 것을 보면 그게 굉장히 크게 눈에 들어옵니다.
당사자들은 당연히 누리는 것들이라 자연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성인이 되고 아이를 낳고서 끊임없이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아이들에겐 10살 이후에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정말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친정엄마는 무능했지만 나는 유능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케이스로 봐야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받았어야 할 것을 못받고 자란 저에겐
10살 이후에도 엄마의 존재감과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데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야기는
맞벌이 부부와 부부 공동육아를 지향하는 최근의 국가 정책 및 육아 트렌드와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제 글들에서 비밀댓글로 몰래 한마디씩 남기고 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자신도 저와 같은 어린시절을 똑같이 그대로 겪었고,
굉장히 큰 상처였으며, 빈 구멍이었다.
요즘 같이 맞벌이를 장려하고 아이를 국가나 기관에서 맡아 키우는 게 당연하다는 추세가 계속되는 것이 무섭다.
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잘 배우고 유능한 국가 인재들이 집에서 그대로 20년씩 썩고 있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의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닙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거의 하루종일 유능감을 느낄 일 없이 집에 머물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트타임 근무개념이 보다 더 강하게,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도 살리고 애들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파트타임 근무제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시간제 알바를 뜻하는 것이 아닌, 정규직원의 파트타임 근무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만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어도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파트타임 근무제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 공무원, 공장, 국가기관, 병원 어디든 오후 4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근로제도가 도입되었으면 합니다.
선진국의 예를 드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이미 유럽 선진국들에는 광범위하게 도입된 근로제도이기 때문에 언급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과 가정 양립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와의 절대적인 시간이 분명히 필요하고,
이 시간들이 부가가치가 없는 버리는 시간 같지만 이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미래 인재의 인격과 생산성의 밑거름이 됩니다.
오늘의 3줄 요약
엄마노릇은 10살까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엄마가 20년가까이 집에서 썩을 수도 없다.
오후 4시 이전에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근로제도 도입이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