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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이놀이터 Dec 07. 2015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자를 거부한 여자

    

나는 '여자'라는 단어가 싫다. 

여성단체에서 일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여자” 뜻  ①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   ② 여자다운 여자   ③ 한 남자의 아내나 애인.    

이런 뜻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아마도 남성이 만들었을 것이다.

젠더라는 말을 여성단체에 와서 처음 들었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답게 길러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여자다운 것은 뭐지?

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젠더 경험이 뭘까? 생각해봤다.

무수히 많겠지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기억 속에서 아쉬움과 속상함으로 지워지지 않은 경험들이 있었다. 

나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했던 것들.

지금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    


여자다운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것.    


중학교 때 일이다.

우리 집은 남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

나는 성심여중에 다녔기 때문에 집에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때는 걸어 다니는 것이 좋았다.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고, 어른들 얘기처럼 낙엽만 굴러가도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웃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린 학교에서 끝나 집으로 걸어올 때면 어김없이 문구점에 들러 여러 군것질거리들을 사서 나눠 먹으며 걸어오곤 했다.

그때의 기억은 좋았던 것 같다.

이야기들,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리는 값싼 군것질거리들, 말괄량이 친구들 등등 여러 단 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막는 것이 있다면 아빠의 매일 같은 잔소리였다. 

오빠들에게는 하지 않는 잔소리. 

   

“여자아이들은 왜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뭘 먹는지 모르겠다.

  치마 속에 바지 입지 마라

  걸음걸이는 조심스럽게 해라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마라 “ 등등    


처음에는 군것질 음식이 몸에 안 좋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오빠들에게는 그런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난 그 잔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친구들과 함께 걷고 먹는 시간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친구들과의 추억보다는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먹으면 남들이 안 좋게 본다는 생각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말이었다.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날일 거라 생각도 못했다.

알았더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찾고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난 순종을 배웠고,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말하고 자신감 있게 주장할 만큼 똑똑하지도 공부를 잘할지도 못했다.

그래서 난 아빠의 선택을 나의 선택인 양 하고 말았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그때 당시 고등학교 1학년 끝날 무렵에는 이과와 문과를 선택해야 했고,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반이 나뉘어졌다.

후에 3학년 원서를 쓸 때는 문과를 선택한 사람은 이과에 해당하는 과를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던 것 같다.

당시 공부는 못했어도 수학만큼은 우리 반 1등과 버금갈 정도로 잘했었다. 

그래서 난 이과가기를 바랬다. 수학과를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단칼에 잘랐다.

여자가 이과에 가서 뭐 할 거냐며 문과에 가라는 것이었다.

문과에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 없었다. 내가 못하는 것만 있었다.

하지만 아빤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적성 ․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선택하게 했다.

결국 난 문과에 갔고, 과목 중에서 제일 못하는 사학과에 가고 말았다. 

그 후 나의 대학생활은 학과 공부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집중되었다. 마음 둘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책임졌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하고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대학에 들어갔다.

아빠는 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여자 대학생 하면 떠오르는 모습으로 대학을 다니는 딸을 두고 싶어 하셨다.

긴 머리에 화장끼 없지만 지적인 모습에 원피스, 가디건을 걸치고  한 손에는 공책과 전공서적을 들고  반대편 어깨에는 핸드백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여대생의 모습.

드라마가 아빠를 망쳐놨다.

아니 나의 대학생활을 망쳐버렸다.

나의 통근시간은 저녁 8시. 그 이후로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문을 잠가버렸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지만 8시 이후 문을 잠가버리면 난 거의  1시간가량을 집 앞에 있다가 근처 후배 집에서 잠을 자야 했다.

통근 8시로 정한 것은 밤늦게 귀가하는 내가 걱정되서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늦은 밤 집 앞에 서있는 거며, 후배 집에 자러 가는 그 길은 더 위험했다.

결국 아빠는 나의 순종을 원했던 것 같다.

난 대학생활 내내 농활이나 학술세미나, 동아리 MT 등 1박을 해야만 하는 곳들을 찾아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까놓고 말하면 남자 선배들처럼 동기들처럼 아무 제약 없이 이곳저곳에서 잠도 자고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하고 싶었다.

그런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지만 나에게 아빠는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 두려움이 너무도 커서 내가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것들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늘 허락되지 않을 것들에 대한 허락을 요구하고 가슴 아파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빤 막내 고모와 얘기를 하고 나를 광주에 보내버렸다.

그때 당시 막내 고모는 SK텔레콤 대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난 판매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던 것 같다.

아빤 그곳에서 일하다가 고모부가 SK본사에 다니는 괜찮은 사람을 소개하여주면 나를 시집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고모부와 계약을 했다.

말로는 네가 열심히 하면 전주에 대리점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많이 힘들고 외로운, 그리고 막막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일과 고모를 도와 집안일을 해야 했다. 

내 인생의 목표는 결혼이 아니었는데 아빠의 목표는 내 결혼이었나 보다. 

늘 빨리 치우고 싶다고 하셨다. 너처럼 말 안 듣는 자식은 처음이라며... 엄청 미워하셨다. 

1년쯤 일했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렸을 적부터 나를 업어 키워주셨던 할머니. 나에게는 엄마보다 더 애착이 갔던, 나를 우리 집에서 가장 사랑해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난 그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임종도 못 봤을 뿐 아니라 난 불행했었다.

할머니 장례식을 이유로 난 전주로 내려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까지 나를 도와주셨다 생각했니 더 슬펐다. 나의 든든한 지원자가 없어졌다.    


결혼을 했다. 

난 아빠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가족을 따로 갖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런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결혼이 여자에게는 얼마나 여자답기를 강요하는지를.    


더 큰 제약과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전까지는 딸로 태어나서 여자답게 살도록 교육받고 강요받았다면

결혼은 여자로 자란 내게 아내, 엄마, 며느리란 역할을 더해주었다.    


음식은 여자인 내가

청소 및 빨래도 여자인 내가 

가족 돌봄도 여자인 내가

육아도 여자인 내가    


난 너무 싫었다.

왜 나만 해야 하는가? 

아내라서? 엄마라서? 며느리라서?

아니다. 가부장제 안에 살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3년 전인가 있었던 일이다.

대학 졸업 후 동아리 송년모임에 갔었다.

펜션을 하나 빌려 어른들은 밖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아이들은 펜션 안에서 놀았다.

밖에서는 고기와 술,  옛날이야기들이 한참 오갔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라올  때쯤 학교 다닐 때 나를 예뻐해 줬던 5년 차 남자 선배가 어두운 얼굴을 하며 내 곁으로 왔다. 다짜고짜 하는 말이 "요즘 너 참 맘에 안 들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유인 즉 다른 여자 선후배들은 고기 굽고, 설거지하고, 펜션 안에서 아이들을 챙기는데 너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주는 술·고기 먹으며 얘기하고 놀더란다. 정작 선배 자신도 그렇게 있으면서 나에게는 "여자가 말이야!"로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화를 내며 얘기했다.

"집에서 늘 하던 일을 왜 내가 여기 와서까지 해야 해요? 송년모임은 말 그대로 그동안 잘 지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과거 추억거리 얘기하면서 얼굴 보는 자리인데, 이럴 거면 다 시켜먹게요"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화난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곳곳에서 많은 것들이 당연하게 요구된다. 나에게.    


왜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해진 걸까?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여자”로 불려졌고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자”로 살도록 강요받았다.

하지만 이젠 가부장제안의 “여자”로 살기를 거부하고‘나’로 살아보고자 한다.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여성’이라는 강제된 범주를 선택으로 바꾸는 것 – 그 안에 해방의 열쇠가 있을 지도 모른다.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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