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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이놀이터 Dec 14. 2016

일상의 싸움이 필요한 이유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다 - 두 번째

아빠가 퇴근 후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선다.

큰딸과 작은 딸은 아빠에게 달려간다.

저녁식사를 위해 아빠는 요리를, 큰딸은 프라이팬에 음식을 볶고 있고, 작은 딸은 접시를 나르고 있다. 엄마는 수저를 식탁에 놓고 있다.    


“그래! 저녁식사는 저렇게 준비해야 되는 거지. 저렇게 함께 살면 좋겠다.”

TV광고 한 장면이다.    


무거운 장을 보고와도 들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부엌에 놓을 때까지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 저녁은 뭐야?”

저녁은 엄마가, 아내가, 때론 딸이 챙기는 것이었다.

상을 다 차린 후 “밥 먹게”라는 말이 나와도 즉각적인 행동은 없다. 느릿느릿하던 일을 멈추고 그런 다음 식탁에 앉는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밥상은 여전하다. 치우는 사람도 그녀다.    


결혼을 하고 나서 어느 것도 함께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어머니가 잘못 키웠어, 너무도 귀하게 키워서 그래” 라며 오히려 힘들게 키워야만 했던 그녀를 욕하며 지냈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녀는 가난 때문에 끊임없이 바깥일을 해야 했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아들 셋과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남편을 두었다. 그런 그녀가 아들 셋과 남편을 곱게 키웠다면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늦은 저녁 아이에게 잠잘 이불을 깔아보라고 했다. 피곤하다며 깔아달란다.

이른 아침 아이에게 자고난 이불은 개라고 했다. 늦었다며 개 달란다.

그리고는 학교 갔다 집에 온 아이는 나에게 저녁 반찬을 묻는다.

남편의 모습과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어머니의 모습과 내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럼 내가 잘못 키운 것인가?

나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여성에게만 치우쳐진 그 불평등을 얘기하고 다녔건만 정작 나의 삶은 달랐다. 이렇게 자란 아들이 나중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아마도 또 다른 엄마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지금은 공부하느라 도와주기 힘들고, 나중에는 직장 다니느라, 가족을 책임지느라 도와주기 힘들다고 하겠지.

나의 언어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도와준다는 표현을 했었다.

“ 상원아! 엄마 설거지 좀 도와줘! 쓰레기 좀 버려줘! 이불 좀 깔아줘! 이불을 다 개고 고맙네! ”

당연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나의 일이었고, 그 일을 함께하면 나는 고마워했다.

가끔 상원이는 “왜 내가 이불을 깔아야 돼?”, “설거지 싫어! 엄마가 해”

아들에게 있어 일상의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 있었다.     

아마 남편도 그렇게 컸으리라. 그래서 그에게는 또 다른 엄마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 엄마가 나였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역할이 싫다며 진짜 엄마에게 가서 살라고 했다.

그런 내가 아들에게 엄마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엄마인 내 탓만은 아니라는 것은 안다. 다만 나 또한 그런 가정 안에서 컸고, 아들은 어머니의 아들이었던 남편과 나를 보며 자랐다.

나는 그동안의 남편의 습관과 관념을 깨는 데 지쳤고, 이제는 안 한다며 선언했지만 아들의 그동안의 습관과 관념을 깨기는 커녕 강화시켰음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변기 전쟁을 치렀지만 여전히 아들은 변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것을 강요하거나 설득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함께 사는 방식이어야 함을 얘기하지만 나의 행동은 여전히 말과 다르다. 사실 설득하고 싸우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라는 역할에 충실하며 일상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아들로서 키워진다는 말을 여성학에서 많이 들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키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학생이라서, 아직은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라서 그렇게 키웠다고 나름 변명을 했다. 하지만 보살핌과 함께 사는 것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요즘 실감하며 반성한다.

문득 남자들이 안정을 찾기 위해 결혼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엄마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산다면 안정보다는 행복이라는 말을 썼을 텐데 아마도 남자에게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엄마를 동시에 얻는 삶에 꼭 필요한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그들은 여전히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며칠 전 저녁에 이불 까는 것으로 아이와 또 싸움이 났다. 

“나는 학생이야! 엄마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라고! 내가 왜? 엄마가 깔아!”

“학생이라서 네가 자야 할 이불도 못 까는구나! 그래서 양말도 옷도 빨래 바구니에 못 넣고! 이 모든 것을 엄마만 해야 한다고 어디에 쓰여있니? 그럼 너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을 하는 건데?”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아빠를 보고, 남편을 보고, 아들을 보고 변하지 않는 벽을 느끼며 힘들어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나 또한 그 벽에 벽돌 한 장 한 장 올리면서 가부장제 문화를 소리 없이 유지시켜왔음을 이제야 아들의 모습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동안 가족 간의 싸움과 불편한 감정을 겪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배려하고 또 희생했다. 그것을 희생이라 표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반복되는 일상의 싸움을 미뤄서도 멈춰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느 날 상원이는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이 있어야만 살게 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는 상대방을 탓하며 불행하게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더 이상 너의 엄마가 되기 싫다고 했다.
함께 사는 법을 모른 너와 함께 사는 것은 불행하다고 했다.
아들에게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네가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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