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리동을 아시나요?

응답하라 1988 실사판 염리동을 아시나요?

by 신작가

나는 염리동이라는 동네에서 자랐다. 서울 이대입구역 8번 출구에 내려서

오래된 한의원을 지나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서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그런 언덕을 지나면

좁은 골목길이 나오는데 그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나가고 나면 오래된 문방구가 나오는데,


우리는 그 문방구 윗집에서 살았다. 최근 응답하라 1988을 보며 옛날에 살던 그 동네가 떠올라 장면 하나하나 볼 때마다 자꾸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그리움일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일까? 그 동네의 정취에 대한 그리움일까?




우리 집 앞에는 작은 방앗간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앗간에서 만드는 참기름 냄새와 깨 볶는 냄새는 항상 우리 집 근처를 맴돌았다. 그 방앗간 사는 동생이 둘 있었는데,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내복 바람으로 우리 집에 놀러 와 컴퓨터 게임을 하고는 했다.



그때 당시 아버지는 작은 해운회사를 운영하셨고, 어머니는 분식집과 피시방을 운영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초등학교 어머니 회장이셨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본업은 보험 설계사 셨는데, 집에 있으면 어머니의 전화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오지랖도 넓었다.


때가 되면 동네 어머니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김장을 하곤 했는데, 김장할 때 한 입씩 입에 넣어주시는 김치 맛이 정말 맛있었다. 배추에 묻히는 매콤한 양념 냄새와 어머니와 친구분들이 수다 떠는 시끌벅적한 소리까지 김장의 맛을 더했다.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집 앞에 고양이들이 자주 싸움을 하고는 했는데, 가끔 패싸움이 나면 아주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바로 우리 집 바로 밑이 문방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 밑이 문방구라는 점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다.

그때 당시 미니카 경주가 굉장히 유행이었는데, 문방구에는 항상 트랙이 설치되어 있어 여러 가지 개조를 한 후 바로바로 시험해볼 수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포켓몬 카드를 먼저 살 수 있었고, 사고 싶을 때 언제든지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다양한 포켓몬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염리동에서 대흥동으로 가려면 항상 높은 언덕을 내려가야 했는데, 가끔 겨울이 되면 길이 심하게 얼어서

다들 내려가지도 못하고 옴짝달싹 못하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썰매 탈 수 있는 도구 아무거나 가져와 썰매를 타고는 했다.




힌번은 집과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지붕 위를 뛰어다닐 수 있었는데, 한 번은 동생하고 그런 장난을 하다가

갑자기 정체모를 아줌마가 올라와 우리를 심하게 혼내셨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다가 밑으로 내려와 동생을 찾았는데, 동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나이에 그 아줌마가 내 동생을 납치한 줄 알고, "제 동생 어딨어요!? 제 동생 내놓으세요!"라고 소리쳤고, 아줌마 왈 : "떨어져 죽었다!"라고 말했다.

내 생애 동생 때문에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 동생이 "형 나 여기 있어"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분식집 이름은 '호호 분식'이었다. 내 동생과 나의 마지막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었는데, 나는 그 이름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인 거 같아 맘에 들었다.

분식집은 작은 공간에 비닐 칸막이를 쳐두고 포장마차처럼 대충 플라스틱 동그란 의자를 가져오셔서 앉을 수 있게 해 두셨는데, 아침이 되면 사람들이 어묵을 먹고 가거나, 친구들이 오다가다 들러서 떡볶이를 사 먹고 가고는 했다.

친구들이 가면 어머니가 꼭 서비스를 이것저것 주시고는 했는데, 나는 그렇게 퍼주면 남는 게 있겠냐면서 불평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는 마침내 이사를 갔다. 나는 전학을 가기도, 이사를 가기도 너무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열심히 노력하신 끝에 정릉에 좋은 아파트를 구하셨고, 나도 아파트를 보고 나서는

그렇게 좋은 집에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뒤로도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어느덧 세월이 많이 흘렀다.


중국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졸업 후 재수를 하고 군대를 갔다가 돌아오니

내가 알던 염리동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염리동 언덕을 넘어가면 아현시장으로 가는 아현동 길이 있는데, 염리동과 아현동 구역을 나눠놓고

아현동을 전부 부수고 있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북아현동에 있는 성당을 가기 위해 그 길을 자주 왔다 갔다 했었다.

어머니와 시장을 가는 것도 나한테는 일과 중 하나였는데, 어머니의 흔적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현실에 가슴이 아려왔다.


오랜만에 찾아간 곳에는 아직 몇몇 분이 살고 계셨고 인사를 하며 근황을 물으면 다들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갈 계획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아현동은 윤곽만 남았고 대신 그 자리에 휘황찬란한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았다.


내가 살던 집 밑에 태양 문방구는 결국 장사를 접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신다고 하셨다.

IMG_1118.JPG 나의 어렸을 적 모든 추억이 담겨있는 태양 문구 그리고 문구점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래된 가게를 굳건하게 지키고 계신 할아버지가 떠나신다니, 내 추억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왜 나는 이 곳을 이제야 찾아왔을까? 왜 이제야 다 죽어가는 동네를 찾아와서는 추억을 회상한다고 기웃거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 오면 어머니 생각에 괴로워서 그랬을까? 아직 성공하지도 못한 그때 그 시절 코흘리개가 성공하지도 못한 채 나름 살아왔다며 여기저기 인사를 하는 게 건방지게 생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현금이 없어서 정리하시는 물건 못 사서 죄송해요 건강하세요.. 동네 분들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염리동 안녕. 내 추억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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