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족 단톡 방을 나간 이유.
한국을 떠나 호주에 오고 나서, 외롭거나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솔직히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들이 너무 감사하고, 한국에서 살 때 보다 내면적으로 성장했으며 심지어 한국에서 살 때 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왜 내 한국에서의 삶은 그렇게 답답하고 속상한 일 투성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던 것 같다. 군대를 전역하고 누구나 다들 그렇겠지만 전역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일주일도 안돼서 바로 인쇄공장에 들어가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인인 아줌마는 내게 집 월세를 내라고 했고, 함께 사는 집인데도 불구하고 지내는 동안은 월세를 내기로 했다.
약 4개월 간 인쇄공장에서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미친 듯이 일만 했더니, 돈은 꽤 모았지만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하루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일을 그만두고 학교에 복학하기로 했고, 다행히도 성적이 좋아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었기에 학비는 큰 걱정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벌어놓은 돈이 조금씩 바닥나기 시작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정말 운 좋게도 원하던 회사에 인턴으로 합격을 했다.
그때 당시 아직 졸업 전 한 학기가 남아있었는데, 교수님과 잘 협의하여 취업계를 내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나름 큰 회사인걸 알고 있던 아버지는 원래 하시던 생업을 접고, 트럭 사업에 뛰어들려 하셨고, 그 자금을 위해 인턴인 내게 대출을 받아달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너는 자식새끼도 아니야."라는 아버지의 말에 울컥하는 마음에 대출을 알아봤고, 인턴 신분으로 1 금융권에서 아버지가 원하던 돈은 안 나오던 터라 부득이하게 당시 연이율 49%를 자랑하는 대부업에 손을 벌리게 됐다.
6개월 동안은 이자를 갚기에도 벅찰 정도로 엄청난 이자를 내가면서 버티다가, 다행히 신용회복 위원회로부터 햇살론을 받고 적은 연이율로 환승할 수 있었다. 대학에 가기 전 대출 텔레마케팅을 통해서 배웠던 지식이 엄청난 도움이 됐던 것이다.
갚겠다던 아버지는 1년, 2년, 3년이 지나 해마다 돈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하는 나에게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라면서 화를 내셨고, 아버지가 갚을 테니 갚지 말고 가지고만 있으라는 말을 믿으며 5년을 버텼다.
적은 인턴 월급에 이자까지 내느라 빠듯한 재정에 가끔 이자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안돼 아버지에게 말하면, 본인도 없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 라는 대답만으로 일축했다.
아버지와 아주머니가 함께 지내는 집에 갈 때마다 쌓여있는 아줌마의 향수병들과 가방들, 밥은 안 해 먹고 매번 아버지 돈으로 사 먹기만 하는 아줌마가 너무 미웠다.
이제는 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매번 붙어있기만 하면 아줌마와 나는 말싸움하기 일쑤였고, 아버지와 싸우거나 자기 기분이 안 좋으면 내게 화풀이하는 건 예사였다. 정말 화가 났던 건 본인 집이라며 나를 집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꾸역꾸역 아버지를 설득하여 겨우 보증금을 받아내서 결국 독립을 할 수 있었고, 호주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미리 아줌마 집에서 지내기로 얘기를 마쳐놓고는 계약을 끝내고 나니, 갑자기"너 오지 마라, 불편하다"라는 한마디로 겨우 한 달간의 입주를 거부했다. 나는 밀려오는 엄청난 증오에 사로잡혔고 갑작스레 살 곳이 없어진 나는 하는 수 없이 친구 집에 한 달간 머물렀다.
그동안 쌓인 게 너무나 많았던 나는 아버지에게 "다시는 이 빌어먹을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라고 쏘아붙였고 아버지는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인마!"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작년 8월 말 한국에 가서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고, 동생은 나와 가족들을 이어주려고 단톡 방을 만들어놓고 소식을 주고받자는 취지로 단톡 방을 만들었지만, 나는 그때 당시 농장에서 땡볕에 고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동생과 아버지는 좋은 소식이라며 전달해주는 소식들이 너무 얄밉고 짜증이 나서 단톡 방을 나가버렸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몸을 닦고 집안을 안정시킨 후 나라를 다스리며 그런 다음 천하를 경영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학>에 나오는 말인데, 내가 <대학>을 공부했을 때 이 문장은 내게 평생의 숙제를 안겨줬다.
결국 집안을 안정시켜야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데, 나란 사람은 집안도 안정시키지 못하면서 천하를 경영하길 바라고 있었다.
주저리주저리 이런 개인적인 일들을 이 곳에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의 나의 브런치 작품 활동에 있어서 나의 상처와 과거 생각들에 대해서 진솔하게 글을 남기지 않으면, 에세이라는 분야는 내게 너무 큰 벽으로 느껴질 것이고 이런 상처들을 드러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솔직히 아직 아버지와 아줌마에 대한 미운 감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리 명상을 하며 용서하려고 애를 써도 몇 년간 묵혀뒀던 많은 증오와 분노들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런 나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내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진솔한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진솔하게 즐기며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