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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일의 필사, 살아가는 법을 배우다

by 별빛소정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이만 먹는다고 삶이 깊어지지도 않는다. 세월이 지난다고 저절로 뭔가를 이루지는 못한다. 그 시간 동안 읽고 쓰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낸 사람은 달라진다. 언어가 내 안에 쌓이고, 시간을 통과하며 그 언어를 따라 조금씩 나아진다.


세상에 완벽하게 같은 경험은 없다. 특히 책을 통해 쌓인 경험은 섬세하게 나를 조율한다. 읽고 쓰는 시간을 반복한 사람은 어느 날, 그렇지 않은 사람과 분명한 차이를 마주하게 된다. 오늘은 필사 99일 차. 100일을 하루 앞두고 있다. 100일을 지속해 온 일이 나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겨울을 지나 봄을 통과해 이제 초여름의 문턱에 서 있다. 태양의 열기가 점점 짙어지듯, 나 또한 그 시간 속에서 여물어졌다.


첫 필사 책은 김종원 작가의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삶의 한계이다』였다. 필사할 때는 이 책만 끝나면 실컷 자고 뒹굴뒹굴 게으름도 피우자고 다짐했었다. 매일 블로그에 필사글을 올리며 마감에 쫓겼지만, 75일이 지나 한 권을 끝내고 나니 하루도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축적된 시간을 보내온 나는 시작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76일 차에 곧바로 같은 작가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필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브런치에 매일 글을 발행하는 루틴까지 더했다. 매일 심장이 쫄깃해지는 마감 릴레이가 시작된 것이다. 느긋하게 뒹굴거릴 여유자체가 사라지고 마감은 일상이 되었다. 아침에 못 하면 밤에라도 썼다. 밥을 먹듯, 숨 쉬듯, 글을 썼다. 그렇게 매일매일 반복되는 짜릿한 루틴이 내 하루를 지탱했다.


100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부모님 집이 경매 위기에 놓여 변호사를 만나고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해결은 아직 멀었다. 같은 나이의 사촌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실신한 고모를 달래며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실감했다. 물품 반품을 요구하다 보이스피싱에 걸려 돈을 두 번 송금했고, 무지했던 나 자신을 몇 날며칠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국민신문고 민원은 계속 들어왔고, 업무 중 직원과의 충돌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 일이 외부로 번지기 전에 내가 직접 나서 해결해야 했다.


삶은 언제나 예고 없이 요동쳤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었다. 개인적인 일이든 업무적인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일을 겪는 동안 나는 얼마나 소모되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였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바들바들 떨며, 매일 무슨 일이 터질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그 100일 동안, 어떤 일이 닥쳐와도 다시 필사로 돌아왔다. 어떤 혼란이 나를 사로잡아도, 글을 읽고, 쓰고, 생각을 정리해 블로그와 브런치에 내 마음을 마감하듯 담아냈다. 내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매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지켜주었다.


필사는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의 호흡이자 일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나는 필사를 통해 일상의 무게를 덜어내는 법, 흔들리는 마음을 단련하는 법을 익혔다. 나 스스로 깨우쳤다.


읽고, 쓰고, 새기며 매일을 반복한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정말이다. 이게 뭐라고, 혼자 생의 작은 비밀을 가진 사람처럼 슬며시 웃음이 난다. 필사를 하며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고, 감정의 결은 더 깊어졌다. 사랑하는 마음을 오래 간직하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더 아끼게 되었다. 반복의 시간을 통과한 마음은 예민하지만, 더 섬세하고 선명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낙수물이 바위를 뚫듯, 매일 한 방울의 힘은 눈에 띄지 않지만 반드시 작용한다. 그 물방울은 바위를 뚫고, 마침내 갈라지게도 한다. 필사는 그렇게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냈다. 매일 나를 괴롭히던 일상이, 필사를 통해 조금씩 희석되었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난다. 매일 또 다른 문제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할 일들이 채워진다. 어둠을 지나며 나의 뇌는 비워지고 아침이 되면 필사의 글과 함께 비워진 마음을 채운다. 매일 글을 적으며 다시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청명한 글을 쓰고 싶다. 아니, 매일 다시 태어나 청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필사는 나를 가두는 습관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는 숨결이 되었다. 읽고 쓰는 시간은, 잃어버렸던 나를 천천히 데려왔다. 지나온 하루가 아무리 거칠어도, 나는 매일 글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https://blog.naver.com/sjhjh/223871120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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