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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기차 안 멈춘 시간 속으로

by 별빛소정

이른 아침, 부산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익숙하게 지하 통로로 발길을 옮겼지만, 나는 광장으로 향했다. 분수가 사라진 자리엔 나무와 꽃들이 자리를 잡았고, 한 계단씩 올라설수록 역사의 지붕이 가까워지고, 부산의 도시 풍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탑승 15분 전, 전광판엔 탑승 안내가 떴다. 10호차 10C. 좌석 번호를 되뇌며 열차에 올랐다. 내 옆자리엔 한 청년이 앉았다. 서울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듯, 표정엔 긴장과 설렘이 엿보였다. 그는 스카치캔디를 천천히 녹여가며 가족들과 연신 전화를 주고받았다. “엄마, 걱정 마세요. 잘 해낼 거예요. 고마워요.” 다음은 이모였다. “응, 이모. 내 카페는 동네에 원래 있던 작은 카페 느낌으로 하려고. 오픈 기념 떡을 하려는데… 어떤 떡이 좋을까?” 역시 속 깊은 의논은 이모다. 한참을 통화하더니 역무원의 제지를 받고 객차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앞 좌석 주머니에서 KTX 매거진을 꺼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안동유람이다. 지난 화마에 수백 년을 이어온 나무와 집들이 타버렸지만 살아남은 숲은 여전히 초록을 품고, 꽃을 피워냈다고 했다. 선비의 도시, 안동의 풍경과 밥상, 역사와 볼거리들을 소상히 보여줬다. 페이지를 넘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동에, 꼭 가봐야지.’


늘 기차를 타면 좌석에 꽂힌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훑는다. 퇴직 후엔 그 잡지에 나오는 여행지들을 한 달 내내 따라가 보는 것이 내 작은 꿈이다. 이번 달엔 강릉에서 세계 커피 축제가 열린단다. ‘5월엔 커피축제구나.’ 또 하나의 목적지가 마음에 새겨졌다.


잡지를 덮자, 잠이 몰려왔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달콤한 졸음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다리 옆으로 스미는 서늘한 기운.
눈을 뜨니, 중년의 여성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자리 맞아요? 내가 10C인데… 표 좀 봅시다.”

비몽사몽간에 티켓을 꺼내 보여드렸다. “10호차 10C, 맞는데요… 아주머니 티켓도 잠깐만요.” 그녀가 보여준 화면엔 ‘11호차’라고 쓰여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표정이 누그러졌고, 조용히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잠은 다 깼다. 무엇을 할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봄의 연둣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연초록이 진초록으로 옮아가는 계절. 계절의 경계가 차창 밖에서 점점 짙어졌다. 초록의 변주를 한참이나 감상했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옮기자 다양한 얼굴들이 보였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여행을 가는 엄마, 노트북을 분주히 두드리는 직장인,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긴장한 표정으로 종이를 외우는 청년, 팔뚝까지 소매를 걷고 가슴에 태극기를 단 군인, 새초롬히 잠든 마알간 얼굴의 아가씨. 다들 어디론가 가는 같은 시간에 같은 칸의 열차를 탄 동행자들.


두 시간 반 동안 나는 이 좌석에 매여 있고, 기차는 나를 먼 타지에 데려다 놓는다. 이 짧고 긴 여정 안에서, 나는 기이한 동질감을 느낀다. 빠르게 질주하는 열차 안, 모두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조용히 앉아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속도는 시간과 반비례하는 걸까.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차 안, 모두의 시간은 느긋하게 흐른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기차 안에서는 모두 무언가를 멈추고 있었다.


정차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모두 숨을 내쉬며, 잊은 속도를 다시 기억해 내고 일제히 움직인다. 멈춰있던 공간을 등지고 다시 시작되는 분주한 세상으로 나아갔다. 현실은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명동. 수많은 인파 속으로 스며들며 기차 안의 고요한 시간은 머릿속으로 접어 넣었다. 사람들의 숲. 그 속으로 나도 조용히 몸을 숨긴다.


기차는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지만, 사실 그 안에서 진짜 여행은 시작된다. 속도 속에서 느림을 배우고, 낯선 타인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종착지가 어디든, 중요한 건 그 여정 안에서 머문 ‘멈춤’이다. 우리는 잠시 멈추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것은 아닐까? 바쁘게 흐르는 삶 속에서 느릿한 시간을 잠시 맛보기 위해서. 그 멈춤이 있기에 다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시간은 어디쯤에서 멈추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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