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나에게 낭만의 도시이다. 초등학교 6학년, 생애 첫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갔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다보탑과 석가탑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혼자 머리를 손질하지 못해, 앞가르마를 탄 부스스한 긴 머리를 어설프게 묶은 모습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촌스러운 사진 속, 내 옆에 서 있던 짝꿍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단짝 친구다.
대학 신입생 때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경주를 찾은 적도 있다. 완행열차를 타고 세 시간이 걸려 도착한 경주. 당시엔 대중교통이 제대로 없어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불국사도 보지 못하고 경주역 근처를 맴돌았다. 구두를 처음 신은 날이었다. 멋을 내느라 고른 높은 굽의 구두가 발에 고통을 안겼다.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발톱에 피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걸었다. 발 뒤꿈치가 다 까지고 며칠 후 발톱이 빠졌다. 새 발톱이 자라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그 시절엔 ‘경주에 데이트 가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 친구와는 깊게 만나지도 못하고 헤어졌고, 이후 경주에서 데이트한 친구들과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행히 남편과는 결혼 전에 경주에 가지 않았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경주에서 자전거를 빌려 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보문단지를 누비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페달을 밟으며 웃고, 땀 흘리고, 수다 떨던 순간들은 추억 속에서 여전히 반짝인다.
몇 해 전, 단짝 친구가 인생의 큰 고비를 맞았을 때도 우리는 경주로 향했다. 추석이었다. 시댁에 갈 이유가 사라진 그 친구와, 나 역시 이유를 만들지 않고 함께 토함산에 올랐다. 동이 트는 새벽, 산 정상에서 마음속 묵은 짐을 하나씩 후- 하고 날려 보냈다.
경주는 벚꽃의 성지다. 매년 경주의 벚꽃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지만, 제대로 만난 적은 드물었다. 피었다가 금세 져버리는 그 짧은 절정을 늘 놓쳤다. 이번 봄에 찾은 경주에도 바닥에 수북이 쌓인 꽃잎들만 밟고 돌아왔다. 그조차도 경주의 추억이다.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공연을 보러 오기도 했고, 가족들과 소고기를 먹으러 들르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캘리포니아비치에서 물놀이를 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혹은 이유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마다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경주는 언제나 내게 가장 편안한 선택이었다. 화려한 환대가 아닌, 조용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는 도시. 늘 그 자리에 있는, 변함없는 안식처. 수막새의 미소처럼 고요하고 자비로운 곳이었다.
최근에는 하루 휴가를 내어 다시 경주를 찾았다.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한 오아르 미술관이 궁금했고, 천년서고도 보고 싶었다. 대릉원을 배경으로 자리한 오아르 미술관. 유튜브에서 들은 건축가의 설명 덕에, 경사진 지붕의 선과 선 사이에서 신라 무덤의 곡선미가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과연 상상했을까. 천년 후 누군가가 자신의 무덤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예술작품을 감상하게 될 줄을.
천년서고는 경주박물관 뒤편, 숨겨진 공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송지영작가님의 글을 읽고 꼭 가보고 싶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석등은 마치 "여기는 내가 주인공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위용을 뽐냈다. 그동안 탑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던 석등이, 이 공간의 주연이었다. 고요한 서가와 통창으로 보이는 초록의 풍경이 어우러져, 시간의 경계 밖에 있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 경북천년숲정원에 들렀다. 숲에 들어서면 나는 정화된다. 편백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온몸이 피톤치드로 채워지는 듯하다. 꼬불꼬불 이어진 데크길은 비밀의 정원처럼 신비로웠다. 그 길목에서 마주친 뻐꾸기 소리, 야생화와 호스타의 정갈한 아름다움. 무궁화나무 터널 아래를 지나며,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요즘, 이유 없이 마음이 무겁다. 아니, 사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다가올 일이 두려운 미래, 부모님과 경제적인 걱정들. 삶은 늘 문제투성이지만, 경주는 그 모든 고민을 말없이 안아준다. 경주에서 나는 예술을 보고, 책을 읽고, 숲을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도시. 그 안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삶은 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오고, 감당하기 벅찬 문제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나를 잊지 않게 해주는 장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경주는 그런 곳이었다.
예술로 감각을 깨우고, 책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정화하는 동안 나는 다시 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나에게 경주는 잊고 있던 낭만을 불러내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채워주는 공간이다.
세상은 바쁘고 삶은 복잡하지만, 가끔은 조용한 미소처럼 곁에 있어주는 장소가 우리를 붙잡아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낭만인지도 모른다. 낭만을 찾고 싶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경주로 간다. 그곳엔 늘 내가 머물 자리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