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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하노이에서 다시 흐르다

by 별빛소정

지난주 며칠 동안 베트남에 다녀왔다. 수도 하노이는 물의 도시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 폭의 풍경화처럼 300여 개의 호수가 도시 곳곳에 스며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물과 함께 깨어나고, 물과 함께 살아간다.

호안끼엠 호수는 하노이의 심장이다. 호수를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 달리는 사람, 물건을 파는 상인과 관광객까지 모두 섞여 하나의 물결이 되어 호수를 따라 흘렀다. 다리를 건너 사당으로 들어서자 소원을 빌며 피운 향 냄새가 매캐하게 코끝을 찔렀다. 사당 안쪽에는 호수를 수호했던 거북이 두 마리가 살아있던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등껍질에는 천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했다.


차를 타고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을 둘러보았다. 퇴근길의 오토바이 행렬은 마치 파도 같았다. 커다란 매트를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 다섯 식구가 매달린 오토바이, 투피스를 입은 여성을 태운 오토바이 택시까지. 혼잡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길을 건너려면 배려보다는 대범함이 필요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남은 성요셉성당을 둘러보고, 콩카페에 들어가 코코넛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입안 가득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퍼지고, 창문 너머로 오토바이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다. 길거리에서 식사하는 현지인들과 섞여 앉으니, 잠시나마 나도 하노이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첫 식사는 쌀국수였다. 동행들은 “고수 빼고.”를 외쳤지만, 나는 오히려 “고수 듬뿍!”을 주문했다. 주말농장에서 고수를 키워 먹을 정도로 나는 고수를 좋아한다. 내게 쌀국수는 고수의 향으로 완성되는 음식이다. 향긋한 고수 냄새가 국물 위로 피어오르자, 하노이의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를 담근 소스에 쌀국수와 야채를 적셔 먹는 분짜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고기와 허브, 달콤 짭짤한 소스가 어우러져 입안이 환해졌다. 미슐랭 셀렉티드 레스토랑에서 맛본 반쎄오와 짜조도 고소하면서도 바삭한 식감이 절묘했다. 모든 베트남 음식이 내 입맛에 맞았다.


가이드의 배려로 찾아간 한식당은 오히려 깊은 맛이 부족했다. 현지 재료로 흉내 낸 한식은 본래의 맛이 아니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현지 음식을 즐겨 먹는 편이다. 해외여행을 가서 굳이 한식을 찾을 이유가 내겐 없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청각장애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이었다. 학용품으로 채운 선물박스 100개를 준비해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용품과 캐릭터 부채, 키링 등을 받은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다. 교실로 들어가 한글 쓰는 법을 알려주고 한복도 입혀주었다. 색종이로 한복을 접고, 클레이로 김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먼저 수화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일곱 살이에요.” 나와 짝이 된 아이가 수화로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을 자신의 노트에 한글로 적더니, 자신의 이름도 내게 적어보라고 했다. 우리는 말이 아니라 눈빛과 웃음으로 대화했다. 활동이 끝나갈 무렵, 학교 앞에는 가족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몇 시간밖에 함께하지 못했는데도 정이 들었다.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다음 날,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하롱베이였다. ‘용이 내려온 곳’이라는 뜻 그대로,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1,600개가 넘는 섬과 기암괴석들이 떠 있었다. 크루즈를 타고 석회동굴을 걸으며 시간이 만든 자연의 조각 작품을 감상했다. 노를 저어 작은 동굴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니, 물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남았다. 세상의 소음이 모두 멎은 듯했다.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가파른 계단 400개를 숨을 헐떡이며 오르니, 흐린 날씨 속에서도 섬들이 수묵화처럼 피어올랐다.

이번 여행은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주는 포상과도 같았다. 누군가를 모시거나 인솔하는 여행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고, 정신없는 도심의 소음 속에서도 그들만의 문화를 느꼈다. 자연의 절경 속에서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노이에서의 며칠은 내 안의 고요를 되찾아 준 시간이었다. 그동안 무기력함에 빠져,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들에 묶여 있었다. 글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열심히 살아도 마음이 비어 있었다. 하노이의 물결과 함께 흐르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웃으며 먹고, 걷고, 이야기하며 나를 회복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하노이의 물결이 내 안의 멈춘 시간을 깨웠다. 삶은 흐를 때 다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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