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루에 스민 삶의 감정들

by 별빛소정

오늘은 유난히 많은 일이 한꺼번에 밀려든 날이었다. 삼성 공모전 1차 심사에 합격하여 서울 본사에서 진행되는 발표를 준비하느라 마음은 내내 긴장으로 가득했다. 전날 서둘러 스크립트를 만들고 예상 질문을 정리했지만 준비가 충분치 못하다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부산역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는 창밖 풍경이 흐르는 속도로 생각도 함께 흘러갔다. ‘오늘만 잘 버티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본사에 도착했을 때, 담당 팀장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스테이크 솥밥을 함께 먹고 아몬드 라떼를 마시며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후 두 시, 관계자들 앞에서 진행된 10분의 PT를 하는 동안 심장은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20분 동안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의 연속이었다. 예리한 지적에 버벅거리기도 하고, 엉뚱한 답을 내놓은 순간도 있었다. 발표가 끝난 뒤에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발표를 마치고 곧장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으로 향했다. 꼭 보고 싶었던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세잔과 르누아르의 작품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두 화가의 서로 다른 결이 한 공간에 조용히 공존하고 있었다. 세잔의 거칠고 두꺼운 붓질, 르누아르의 부드럽고 따뜻한 색감. 같은 인상주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본 두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대비되며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두 화가 모두에게 영향을 받은 피카소의 그림 속에 상반된 그림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두 화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남기고 있었다.


전시장을 나와 카페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회사 회장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간암 4기를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너무 놀랬다. 6년 동안 회장으로 조직을 이끌며 많은 공헌을 하셨던 분이셨는데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렸다. 몇 달 전 건강을 회복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대화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삶이 언제 어떻게 방향을 바꿀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또렷하게 실감되었다.


회장님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울산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서른 살 조카의 결혼 청첩장이었다. 새 출발을 앞둔 두 사람의 환한 표정을 보며 앞날을 축복하는 인사를 건넸다. 누군가는 삶의 마지막 문을 조용히 닫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을 환하게 열고 있었다. 새 출발과 죽음의 그 두 장면이 나란히 머릿속에 지나갔다.


돌아보면, 삶은 늘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기쁨과 슬픔이 겹쳐지고, 시작과 끝이 교차하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삶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삶이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기쁨 옆에 슬픔이 있고, 이별 옆에 만남이 있으며, 죽음 옆에 사랑이 있다.”


나는 다시 마음속에 작은 다짐 하나를 적었다. 언제 어떤 일이 찾아올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주어진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모든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 오늘은 그 단순한 진실이 또렷하게 다가온 하루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