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마음에도 콩나물은 자란다

by 별빛소정

일요일 저녁, 근처에 사는 선배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시간 있어요? 와서 콩나물 좀 가져가요.”

외투를 걸쳐 입고 서둘러 나간 곳에서 선배는 하얀 비닐봉지에 소복이 담긴 콩나물을 내밀었습니다. 지인에게 한 시루 선물 받았는데 혼자 먹기 아까워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봉투 너머로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에 마음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내게 콩나물은 '엄마의 시간'이었습니다. 친정집 식탁에는 시원한 국과 아삭한 무침이 매주 올랐습니다. 어릴 적 엄마 곁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을 때면 껍질을 벗기고 뿌리를 떼어내는 일이 어찌나 지루했는지 모릅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어른이 된 후 내 손으로 직접 콩나물을 사서 반찬을 만드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콩나물을 건넨 선배는 지난 연말, 4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했습니다. 조직의 정점까지 올랐던 그녀의 삶은 치열했습니다. 신생아 시절 입은 화상으로 몸이 약해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많았고, 그때의 열등감은 오히려 그녀를 채찍질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쉼 없이 읽었습니다. 지금은 주말농장에서 풀을 뽑으며 마음의 평화를 일구고,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는 예술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18년 전 코칭 클래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생과 마음의 힘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인연은 재작년 선배의 연락으로 다시 이어졌습니다. 독서 모임을 해보자는 제안에 선배는 흔쾌히 응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독서모임과 매일 필사를 함께하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합니다.


소복이 쌓인 콩나물을 바라보며 콩나물을 키우는 과정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루에 담긴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은 그저 밑으로 다 빠져나갑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헛수고 같아 보이지만, 콩나물은 그 찰나의 물기로 쑥쑥 자라납니다.


우리의 마음공부도 그랬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꾸준히 응원의 물을 부어주었습니다. 선배는 나 덕분에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내게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 주었습니다. 흘러가 버린 것 같았던 시간과 위로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들이 우리를 이토록 단단하고 아삭한 어른으로 키워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건강한 양분이 되어 함께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하얀 봉지 안, 서로를 지탱하며 빼곡히 머리를 맞댄 콩나물을 봅니다. 오늘 밤엔 부지런히 콩나물을 다듬어 따뜻한 국을 끓이려 합니다. 물이 다 빠져나가는 허망한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서로를 적셔온 다정한 안부들이, 오늘 내 식탁 위에서 가장 귀한 생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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