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 위에서 : 싯다르타를 읽고

by 별빛소정

10여 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부처님의 일대기를 다룬 경전 같은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소설 속 싯다르타는 부처님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다가왔습니다. 역사 속 고타마 싯다르타는 한 명이지만, 헤세의 문장 속에서 '고타마'는 이미 완성된 깨달음을 전하는 자로, '싯다르타'는 그 가르침조차 뒤로한 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구도자로 그려집니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성자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진창과 꽃길을 온몸으로 구르며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진짜' 인생을 선택합니다.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아들이라는 안락함을 버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인 고타마를 만나지만, 그의 완벽한 가르침마저 뒤로하고 다시 홀로 길을 나섭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타인에게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발로 걸어가 찾아내야 하는 '체험의 영역'임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김종원 작가와 함께한 헤세 필사를 마무리하며 이 책을 다시 읽는 동안, 제 머릿속에는 하나의 명제가 선명해졌습니다. “남이 알려준 깨달음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행하는 명상과 수행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일들에 부딪히고,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환희의 정점에 서본 후에야 비로소 나만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입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갔듯, 싯다르타 역시 세상의 희로애락 속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그는 수행자였으나 유녀 카말라에게 사랑의 기술을 배웠고, 자비로운 구도자였으나 탐욕스러운 상인이 되어 도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부처가 왕궁 밖 생로병사의 고통을 '관찰'하며 도를 구했다면, 소설 속 싯다르타는 그 고통을 직접 '살아냅니다'. 배고픈 수행자의 고독부터 부유한 자의 허무까지, 그리고 자식을 향한 지독한 애착과 상실의 아픔까지 말입니다. 그는 비로소 모든 생의 비린내를 맡고 난 뒤에야 강물 소리에서 우주의 섭리를 듣습니다.

저도 한때 깨달음의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저를 고요한 산속이 아닌 거친 세상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깨진 사랑에 아파하고 30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세상에 부딪혔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지고한 기쁨을 맛보았고, 깊은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랑의 허무함을 알게 되었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다 사기에 휘말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타깃이 되어 세상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지요.

그 모든 소용돌이를 지나온 지금, 저는 비로소 이곳에 평온하게 서 있습니다. 정신적인 깨달음과 물질적 풍요가 나란히 흐르는 이 지점에서 깨닫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그 길 위에 있으며, 이 소설은 이제 제 '인생의 책'이 되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강물을 보며 시간의 환상을 깨닫습니다. 강물은 과거에서 흘러와 미래로 가지만, 정작 강물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실체가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형체가 없습니다. 시작점과 끝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강물처럼, 우리의 삶 또한 오직 현재라는 찰나 속에 모든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소리가 어우러져, 그리움으로 애태우는 소리와 깨달은 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과 죽어가는 자의 신음소리, 그 모든 소리가 하나가 되었고, 모든 소리가 서로 얽히고설켜 수천 겹으로 엉켜 있었다.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지고, 모든 소리, 모든 목표, 모든 동경,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선과 악, 그 모든 것이 모여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모여 사건의 강을 이루었고, 삶의 음악을 이루었다.

다시 이 책을 읽으며 싯다르타는 제게 속삭입니다. 당신이 겪은 그 모든 고통과 기쁨은 단 하나도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 모든 흐름이 모여 지금의 당신이라는 깊고 푸른 강을 이루었다고 말이죠. 삶은 강물처럼 흐릅니다. 어제의 슬픔에 매이지 않고, 내일의 불안에 떨지 않으며, 저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평화 속에서 나만의 문장을 적어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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