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프를 들고 있다 놓아보자. 스카프는 바닥에 사라락 부딪히며 주름이 잡힌다. 아름다운 꽃잎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아마도 햇빛과 바람과 부딪히며 생긴 곱고 가느다란 흔적들이 보일 게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존재와 부딪히며 흔적을 만든다. 철학자 들뢰즈는 그 흔적을 주름이라 했다.
거울을 꺼내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눈가로 잘디 잔 주름들이 웃고 있다. 오랜 시간 사람들과 나눈 호의와 여유가 남긴 흔적이다. 이번엔 두 손을 내려다본다. 지문이 옅어진 손가락 끝이 매끈하다. 내 손과 물과 세제가 만들어낸 흔적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셋째 딸이 다가오면 슬그머니 손이 먼저 나간다.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온 마음이 힘껏 아이를 향한다. 십육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만들어진 주름이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애써 더듬어보지 않아도 모양도 깊이도 개수까지도 짐작하는 주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낯선 주름 앞에 서게 된다. 매일 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내가 알 수 없는 주름을 갑자기 발견해 당황하게 되는 날이 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친정 엄마에게서 내가 모르던 주름을 발견하고 낯선 마음이 종종걸음 치기도 한다. 아이도, 친정엄마도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만나 관계를 맺고 흔적이 남아 주름이 되었나 보다. 궁금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낯설다.
아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의 시간을 만난다. 아이의 주름을 하나하나 펴본다. 주름을 펴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친구의 주름을 펼쳐 보아야만 우리는 그 친구와 함께 새로운 주름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럴 경우에야 '다시-접기'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아이의 주름을 다 펴고서, 다정해진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와 함께 만드는 주름을 다시 만들어본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그 사람의 주름에 새겨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러자면 부지런히 주름을 펴야 한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마음과 생각이 나에게로 온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도무지 이해가 안가."라고 말한다면, 아직 당신은 그 사람의 주름을 채 펼치지 못했거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 사람의 주름을 충분히 들여다보았다면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 그래서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라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도 그 사람도 서로에게 새로운 주름이 된다. 그렇게 관계는 깊어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