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다 갑자기 오래 못 본 친구가 생각났다.
'뭐 해?'
톡을 보냈다.
'점심 먹고 쉬고 있지, 친구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먹던 밥을 마저 먹고 식당을 나오며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그 새를 못 참고 전화벨이 울린다.
"왜 답이 없어?"
"응, 밥 먹고 막 식당 나오는 길. 전화하려고 하던 참이야."
언제 만나도 그저 좋은 친구다.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해 만났으니 32년 지기다. 잠시 외국에 나가 살았던 기간을 빼도 긴 시간이다. 사는 일에 쫓겨 자주 만나지 못해도 한 번만 봐도 일 년이 든든한 친구다.
그런데...
"난 요즘 친구들 만나고 오면 마음이 더 안 좋아. "
"응? 그랬구나. 그런데, 왜?"
몰랐다.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일들이 아직도 친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지, 정말이지 몰랐다. 잊어야 할 것들은 의외로 생명력이 강해, 작은 불씨만 만나도 화라락 불타 오른다. 잊지 못하면 힘들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지만, 쉽지 않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은 '망각'이 아닐까 싶다. 불같이 타올랐던 화도, 10톤쯤 되는 돌을 발밑에 단 것처럼 나를 끌어내리는 낙담도, 돌아서는 등 뒤를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서운함도,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마음을 숨겨야 했던 수치심도, 내 눈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슬픔도... 그 모든 감정을 품었던 순간들이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옅어지고 사라져 갔다. 그 덕분에 나는, 우리는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 것이 '기억의 힘'이라면 인간을 살아가게 한 것은 '망각의 기적'일 것이다. 아무쪼록 친구에게 그 기적이 임해, 평온을 얻길. 훌훌 털 수 있게 언제 만나 맛있는 밥이라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