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막내아들은 학교 방송반이다. 처음 방송반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방송반에 뼈를 갈아 넣는 유형의 청소년은 아니다. 제법 높은 경쟁률을 뚫고 방송반이 되었다면 신나서 빠져들 법도 한데 말이다.
문득 돌아보면 처음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누나들을 선두로 한 가족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자존심 상하는 질문부터 던져 아이를 상심하게 했었다. 누나가 셋, 집안의 장손, 유일한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귀하게 자라리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도 하나, 만만치 않은 5인의 기운에 도통 아이가 기를 펴지 못한다.
합격 당시도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방송반 담당이셨다는 점과 지금은 졸업해 고등학생이 된 사촌 형이 방송반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끊임없는 특혜의 의혹을 제기하며 아이를 놀려먹곤 했다. 성적이 훨씬 우수하고 자신감 넘치던 같은 반 친구가 탈락했고 3학년은 면접 심사위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곧바로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이러한 일들이 일상다반사라 중2인 요즘도 "밥 먹자!" 하고 부르면 제일 먼저 나와서 "누나들도 불러요?" 물어보고 닫힌 누나들 방문 앞에 귀를 대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누나! 밥 먹어!"를 외친다. 결단코 문을 열거나 두드리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점점 말을 명확하게 하지 못한다는 지청구까지 듣고 있다. 피곤한 인생이다.
그런 막내가 일주일 전에 방송반에서 학부모 인터뷰가 있다고 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무슨 내용인데?" 물어보니 그냥 가정의 달 기념으로 학교 유튜브에 올라갈 영상을 촬영하는 건데 인터뷰 형식이라고만 말한다. "다른 부모님 섭외가 다 실패하면, 해줄게. 그래도 가능하면 안 하면 좋겠다. 방송은 부담스러워!"라고 말했더니, 알겠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부탁하면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도 고맙고,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더니 방송반 활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나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그리 대답하고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토요일에 갑자기 내일 촬영을 하기로 했는데 3시에 시간이 되냐고 묻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전체적인 조망과 계획이 가능한 청소년이 될까.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촬영을 하게 되었다.
촬영은 각각 하고 상대의 촬영분을 영상으로 본 후 소감을 밝히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평소 부모님과 자녀 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던 내용, 휴대폰 사용과 귀가 시간, 진로에 관한 고민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묻는 것이었다. 아이가 먼저 촬영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기반해서 인터뷰 문항을 작성한 것으로 보였다. 그 자리에서 질문을 들었던 터라 갑작스럽게 대답하느라 당황하긴 했지만, 시간을 주었다 해도 사실 그이 상의 답을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막내가 자신의 진로를 이야기했을 때 부모님은 지지해주실 것 같다고 대답한 부분이었다. 태권도를 계속할까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막내는 지금도 태권도 도장에 다닌다. 올해 4품을 땄다. 3품을 따고 작년에 태권도를 그만둔 셋째를 보면서 태권도를 계속해 경호 관련 일을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막내에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남자 아이라 몸을 좀 움직이는 게 필요해 보이기도 하고 계속 다니고 싶다니 보낸 것일 뿐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중 2라는 나이가 진로를 확정 짓기에는 이르다 싶고 지금 생각하는 진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인지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다양하게 탐색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정말 이 길이다 싶다면 당연히 지지하고 응원할 거라고 말이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문제지, 하고 싶은 일의 종류가 무슨 문제가 될까. 살다가 마흔이 되고 오십이 되어도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는데 말이다.
영상 촬영은 매우 부끄러웠지만, 어차피 나는 전문가는 아니니 괜찮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색다른 경험을 하고 막내와 공유할 추억이 하나 쌓여 좋다. 아이가 많다 보니 가족이 함께 하는 기억들도 중요하지만, 한 아이하고만 공유하는 추억을 만드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사소한 것이라도 둘만의 추억은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준다. 특별한 이야기들이 반드시 찾아올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 책을 읽고 있는데 막내가 엉거주춤 뒤에서 나를 감싸 안으며 저녁은 뭘 먹냐고 물었다. "내가 밥 주는 사람이니?"라고 투덜대면서도 "뭐 먹고 싶은데? 고등어 졸임 할까 싶은데, 어때?" 물었다. 속없는 우리 중 2, 엄지를 척 올린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