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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Sep 02. 2022

든든함의 보고, 추어탕

   나고 자란 곳이 부산이라 하면 사람들은 늘 “바다가 보여요?”라고 물어온다. 어릴 적 살았던 동네는 부산 북쪽 끝 변두리였기에, 바다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바다보다는 빨래하러 엄마를 따라다녔던 도랑과 약수를 뜨러 다니던 산자락이 더 익숙하지만, 여하튼 바다가 유명한 도시의 이름값을 하느라 그런지 갖가지 생선들이 친근한 것도 사실이다. 동네 시장 노점에서도 노상 아나고 회를 팔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선으로 만든 음식들을 정말 좋아한다.


   초중고 학생일 때 살았던 13평 계단식 임대아파트는 현관문을 열어두면 앞집 마루와 부엌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름만 아파트였지 새벽마다 연탄을 갈아야 했고 현관문을 늘 열어두고 살던 시절이었다. 한여름 더운 날이면 현관문뿐만 아니라 집안의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젖히고 마루에 상을 폈다. 우리는 다닥다닥 상에 붙어 앉아, 엄마가 찐 호박잎에 봄에 담아둔 멸치젓갈을 척 얹어 쌈을 싸 먹는다. 산더미같이 차렸던 갖가지 채소 반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식구가 적었던 102호 아주머니는 열린 현관으로 우리 집 밥상을 보며 늘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남는 반찬이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찬밥을 물에 말아 얹어 먹는 멸치젓도 최고다. 또 말린 갈치를 네모나게 잘라 고춧가루와 간장을 넣어 졸인 것도 정말 별미다. 갈치의 몸값이 비싸 자주 먹지 못했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해 요즘도 말린 갈치를 찾아 헤매곤 한다. 그 외에도 국물이 자박자박하게 끓여낸 호박 넣은 갈치조림, 가자미 넣어 끓인 구수한 미역국 등 내가 사랑하는 생선 요리는 끝이 없다. 그래도 그중에서 지친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음식을 하나 골라보라 한다면, 나는 추어탕을 고르고 싶다.


   추어탕과의 인연은 길다. 그 첫 기억은 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때부터다. 미꾸라지를 담아둔 통이 부엌 바닥에 엎어졌었다. 펄떡대는 미꾸라지를 잡느라 엄마랑 한바탕 난리를 쳤던 기억이 하늘색 타일과 함께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후로도 매년 계절이 바뀌거나 아이들이 기운이 없다 싶으면 엄마는 추어탕을 끓여주셨다. 시래기가 한가득 들어간 추어탕에 산초가루를 뿌려 한 그릇 먹으면 몸이 뜨끈해지고 속이 든든해졌다. 엄마는 생선을 삶아 다 갈아서 끓여주셨는데, 솔직히 말해 그때 통으로 끓여주셨다면 추어탕을 못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꾸라지는 뼈가 생각보다 억세다. 푹 삶아서 채에다 비벼 갈아서 다시 끓여야 한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푹 끓여낸 음식들, 추어탕, 곰탕, 미역국... 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푹 끓이면서 에너지가 응축되고 그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그 에너지로 내가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생각보다 미꾸라지는 비싼 생선이다. 그래서 엄마는 미꾸라지를 사기 어려우면 고등어로 추어탕을 끓여주시곤 했다. 사실 우리는 추어탕 맛을 낸 고등어탕을 더 자주 먹은 셈이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한 후에도 추어탕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지금은 시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셔서 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내지만, 십오여 년 간은 명절이면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시댁은 경주시 오류리로 바다가 멀지 않은 농촌 마을이다. 특히 추석에 내려가면 두 가지 귀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는데, 하나는 바로 논에서 직접 잡은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이고, 또 하나는 산에서 따오신 자연산 송이였다. 언제나 어머님은 커다란 가마솥에 추어탕을 끓이곤 하셨다. 가마솥에 끓이는 추어탕은 정말 진국이다. 일단 추어탕을 한 그릇 먹고 나면 추석 명절의 노동도 즐거움으로 바뀔 만큼의 충만함을 주었다.


   지난달, 방학이라 이런저런 다양한 특강을 맡게 되었고, 몸이 축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루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추어탕 한 그릇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어탕 한 그릇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았다. 평소에는 혼자서 밥을 먹으러 식당에 잘 가지 않는다. 교습소에서 간단하게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먹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추어탕을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당장 추어탕 집으로 차를 돌렸다. 밥을 말아 푹푹 떠먹다 보니 엄마가 끓여주시던 고등어 추어탕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가마솥 추어탕을 먹던 시간들이 줄줄이 엮여 떠올랐다. 멀리 있어도 나를 응원해주는 분들. 나를 믿어주시는 분들. 혼자서 뚝배기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뭔가 세포 하나하나가 꽉 채워진 느낌. 든든했다.


   전에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스개로 미꾸라지를 曼漁라고 부른다고 했다. 날 일, 넉 사, 또 우. 하루에 네 번 하고도 또 하게 해주는 물고기라는 뜻이란다. 무엇을 할지는 각자 상상의 영역이겠지만 원래 한자와는 상관없이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해주는 미꾸라지의 힘을 강조하는 이야기일 게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분명 날 일, 넉 사, 또 우. 하루에 네 번 수업을 하고도 아이들에게 다시 웃어줄 수 있는 힘을 주는 음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는 네 번 실망하고 좌절해도 또 파이팅을 외칠 수 있도록 든든함을 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곧 처서다. 더운 여름도 끝나가고, 방학도 끝났다.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추어탕 한 그릇 진하게 먹어야겠다. 힘내자!


출처 링크 :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78793&menuNo=200026


전라북도_남원_추어탕,채지형 ,출처한국저작권위원회,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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