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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May 01. 2021

'처음'이 쌓여 단단한 삶이 된다.

탄탄대로 벗어나기

 

“오른쪽 첫 번째 도로입니다. 그리고 이어 왼쪽 도로입니다.” 

친절한 목소리에 맞춰 오른쪽 길로 빠져나간다. 이어 다가오는 왼쪽 도로로 접어들기도 전인데 이미 심장은 쿵쿵대다 못해 차창 앞까지 먼저 나가 있다.

“미치겠네. 왜 하필 이런 길로 나와서는……. 그냥 큰길로 쭉 가도 될 텐데.”

룸미러로 흘낏 본 뒤차는 곧 부딪힐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다.

“네네, 간다고요. 죽을 각오로 가고 있다고요. ” 

외곽순환도로에서 빠져나오는 길목, 고가도로에서 나는 또 공포와 만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운전이 정말 고역이다. 평지는 오히려 속도를 즐기는 편이지만, 고가도로에 올라설 때면 불특정 다수에게 욕지거리를 던졌다가 사정을 했다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다. 고가도로에 올라설 때마다 나는 늘 ‘처음’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된다.           




큰아이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남편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결혼 후 외국인 회사에 취직해 다니던 남편은, 도무지 자신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대학 시절 친구였고, 오랜 연애 후 결혼한 남편이었다. 전공과목 공부에 매진하지 못했던 대학 시절을 잘 알고 있기에, 불안과 절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도 해야 했고 아이도 아직 어렸지만, 근처에 친정엄마가 살고 계셔서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대출받아 마련했던 2,200만 원 전세를 빼 친정엄마와 살림을 합치고 차도 팔았다. 그리고 남편은 빠듯하게 마련된 돈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 


남편이 없던 2001년 봄, 나는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샀다. 새로 바뀐 근무지가 대중교통으로는 출퇴근이 쉽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도 탈 줄 모른다. 놀이공원에 가서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놀이기구들은 타지 않는다. 고소공포증으로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한다. 이런 내가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산 것이다. 직장과 집을 기동력 있게 움직이기 위해서, 드디어 내 발은 지상을 벗어난 것이다. 마티즈Ⅱ. 내 인생의 첫 자동차였다. 

차가 처음 왔던 날은 토요일이었다. 퇴근을 두어 시간 앞두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이 들렸다. 약국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창 너머 골목을 향했고, 그곳엔 눈부시게 빛나는 은색 자동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배송 기사분이 차를 가지고 도착한 것이다. 두근두근. 한걸음에 달려나갔다. 


“집이 어디세요?”

간단한 설명을 듣고 차를 받았다는 서명을 한 뒤, 기사분이 물었다.

“정왕동이요.”

“네, 그럼 지금 채워져 있는 기름으로도 갈 수는 있겠네요. 그래도 내일까지 타기에는 부족할 테니 퇴근하시면 주유부터 하세요!”

“아…. 네!”

‘이제부터 주유소도 직접 가야 하는구나.’

차가 생겼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토요일은 5시 퇴근이라 다행히도 밝은 대낮에 첫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다. 만약 그날이 평일이었다면 차를 골목에다 놓고 퇴근했을 수도 있었을 게다. 깜깜할 때 삼십 분을 직접 차를 운전해 퇴근한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 브레이크를 밟고.”

“열쇠를 꽂아 돌리고.”

“기어를 D로 옮기고.”

혼자서 책을 읽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그런데, 웬일인가. 차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음…. 왜 안 가지? 너 왜 안 가니? 뭐가 문제니?”

마음이 급해지면 난 주위의 모든 사물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날도 그랬다. 

“자, 뭐가 문제니? 기름도 있고, 내가 기어도 바꿔줬잖니? 왜? 말을 해보라고? 뭐가 불만이야?”

도로 연수받을 때를 떠올리며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속 페달을 살짝 밟았다. 그래도 뭔가 앞이 막힌 것처럼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20여 분을 그리 앉아 있었을까? ‘오늘은 집에 못 가는 건가? 더 어두워지면 곤란한데….’하며 한숨을 쉬다가 나도 모르게 발에 힘을 줬나 보다. 드디어 차가 움직였다. 기사분이 과속방지턱 바로 앞에 차를 주차해두었는데, 마티즈는 그냥 출발해서는 그 턱을 넘지 못하는 차였다. 바퀴도 작고 크기도 작고 힘도 약했던 마티즈.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워 화도 낼 수 없었다. ‘인연인가보다’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그렇게 집을 향해 첫 주행을 시작했다.      


내 평생 가장 길었던 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시속 80킬로를 지켜야 하나 누구나 100킬로 이상을 달리는 길을 지나야 했다. 옆으로 차들이 쌩 달려가면 마티즈는 휘청, 흔들렸다. 나까지 흔들리는 것 같아 운전대를 꽉 그러잡았다. 고속도로에서 들어오는 차들을 마주치는 교차로도 두 군데나 지나쳤다. 나를 향해 들이받을 듯이 달려오는 차가 너무 무서운데 눈을 감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주변으로는 차들이 쌩쌩 달리며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규정 속도 한참 아래인 50으로 달리면서도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서른 하나. 그날의 첫 주행은 딱 서른한 살의 내 상황과 마음 같았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고, 남편은 공부하러 외국에 갔고. 책임져야 할 것들은 나를 향해 몰려오고, 나는 아직도 미숙하기 짝이 없고. 팔다리가 덜덜 떨리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씩씩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 옆에서 누가 큰 소리만 내도 마티즈처럼 휘청할 것 같은 불안한 나.     


하지만, 결국 나는 도착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을 디뎠다. 좀 후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차에서 내리며 앞으로 마티즈와 오랫동안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마티즈가 건재하면 나 또한 단단하게 잘 살아가리라는 막연한 믿음마저 생겼다. 아마도 그리 믿고 싶었던 거지 싶다. 여하튼 나는 계속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 않고 일 년을 살았고, 남편은 돌아왔고, 운전 실력도 부쩍 늘었다. 일 년이 지난 후 출근 시간에 늦었다 싶을 때면 20분 만에도 같은 길을 달리곤 했다.     





언제나 모든 시작은 비슷하다. 탄탄대로에서 무언가를 할 때는 시작이라 말하지 않는다. 가속도가 붙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이는 곳에서 빠져나와, 내가 잘 모르는 것, 새로운 것, 낯선 일을 할 때 우리는 ‘처음’이라 부르고 ‘시작’이라 이름 붙인다. 그래서인지 처음 하는 일은 늘 어렵다. 그리고 힘들다. 그래서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쉽다. 


그렇지만, 그 낯선 ‘처음’들은 ‘작은 해냄’의 경험들이 쌓여 익숙함으로 남고, 다시 새로운 동기를 유발한다. 느린듯하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다져진 삶들은 얼마나 단단한가. 물론 평생을 ‘처음’의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들도 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고가도로에서는 처음 올라본 것인 양 휘청거린다. 그래도 휘청거린 후에 만나는 새로운 풍경들과 경험에서 예상치 못한 행복을 발견하면 그냥 그 휘청거림을 받아들이거나 감수할 용기를 내게도 된다. 좀 휘청거리면 어떤가. ‘처음’하는 일이 다 그렇지. 익숙해지지 않음을 탓하지 않고 ‘처음’ 하는 일이니 다시 한번 새롭게 즐겨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니 계속 ‘처음’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가속도가 붙은 일만 하는 것도 가끔은 버겁다.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낯설고도 어설픈 ‘처음’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다. ‘처음’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젊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긴 인생의 끝에 다다랐을 때, “대로를 달릴 때도, 그 길에서 빠져나와 덜덜 떨며 새로운 일을 시작했을 때도 혹은 매일 실패하며 매일 다시 시작했다 하더라도, 갖가지 풍경이 다 새로워서, 살만했고, 아름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친절한 네비게이션 안내에 정신을 차린다. 

“오른쪽 첫 번째 도로입니다. 그리고 이어 왼쪽 도로입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오른쪽 길로 빠져나간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은 늘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또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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