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때, 어떤 재단에서 몇몇 학생을 발탁하여 서유럽으로 연수를 보내준 적이 있다.
운수좋게도 그 몇몇 안에 들게 되었고 10박 12일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같이 떠난 친구들은 새로 구입하거나 집에 있던 디지털카메라를 가져왔고, 나만 두툼하고 아주 투박스러운 필름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의 어릴 적 집안사정은 그리 여의치 않았다. 부모님께 디지털카메라가 필요할 것 같다고 주저앉는 목소리로 말하던 내게 사줄 수 없어 미안해하던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필름카메라가 창피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 말고는 줄을 둘둘말아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친구들은 얄쌍하고 어딘가 새침한 디지털카메라를 목에 걸고는 모든 장소에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고 또 찍느라 바빴다.
나는 친구들과 달리 신중해야만 했다. 내게 허락된 필름은 딱 한 통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가끔 꺼내어보는 그 때의 사진들을 보면 한 장소에서 두 컷이상의 흔적이 없다.
하지만 그 몇 컷 안되는 필름사진에는 17살 소녀의 귀여운 흔적들이 남아있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세상 가장 예쁜 얼굴로 남겨보겠다고 눈을 최대한 치켜뜬 사진들과 그 때의 나에게 인상깊었던 장면들이 혹여나 흔들릴까, 숨도 쉬지 않고 찍은 듯한 나름 정갈한 사진들을 보면 웃음이 난다.
요즘은 핸드폰만으로 굉장한 수준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어디 순간이나.
그 어느 순간, 디지털화 된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넘기면 쉬욱쉬욱하고 넘어가는 게 참 쉽게 느껴졌다.
집 안 어딘가에 정갈하게 모아 둔 사진앨범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일, 인화된 빳빳한 사진을 한 장 한 장 손으로 넘길 때 드는 감촉,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게되는 어딘가 흐릿한 사진, 앨범 한권을 다 뒤적거리고 나면 드는 아릿한 감정들. 필름카메라만이 줄 수 있는 것들.
내가 필름카메라를 다시 손에 쥐게 된 이유가 아마도 여기 있는 것 같다. 스쳐가는 것들을 더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필름카메라로는 좋아하는 피사체만 찍게 된다.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들만 담게 된다.
볼갗에 스치는 바람이 찰나의 계절을 실어 나를 때,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황홀한 하늘을 마주했을 때, 나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의 가장 아름다울 한 때를, 잊고 싶지 않을 때.
이제 겨우 24컷정도를 찍었다. 필름 다섯 통을 애욕지게 사들고 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아끼고 아끼는 중이다.
가장 남기고 싶은 순간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