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싫어.
“찐빵이 니는 어릴 때, 좀 싸가지 없었다.”
내 어린이 시절이 어때서 싸가지를 붙이냐 싶은데 엄마 말 들으니 다 맞다. 때는 90년대 IMF가 휩쓸기 몇 년 전. 은행 예/적금만 해도 돈이 불어나고 집은 당연히 가지고 있던 때. 아빠 인생에서 제일 돈 많이 벌 때였다. 그 호황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서 싸가지가 없는 거라고 변명하는 내 어린이 시절은 밉고도 엉뚱했다.
당시 아래층에는 나보다 몇 살 많은 언니가 살고 있었다. 언니의 책 읽어주기 덕분에 뜻하지 않은 선행학습으로 한글을 빨리 떼 버린 나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자꾸 같이 놀자고 조르는 친구가 성가셔서 친구 어머니에게 얘는 태권도만 할 줄 알지, 왜 아직 한글을 못 쓰냐고 공부 좀 시키라는 말을 내뱉어 두 엄마를 당혹케 했다. 이미 다 읽을 줄 아는데 왜 기역, 니은 하나씩 가르쳐 주냐며 어린이집 낮잠시간에 탈출해서 집에 갔고, 애가 없어졌다고 어린이집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엄마는 왜 나를 혼내?’ 엄마에게 혼나고 화가 나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이른 가출을 감행한 적도 있다. 도착 장소는 늘 아빠가 일하는 시장. 시장 상인들 틈에서 잘 먹고, 잘 노는 딸의 모습에 가출한 딸을 뒤따라온 엄마는 기막히다는 말을 실감했더랬다.
이런 나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문 빨리 안 열어준다고 대문을 뻥뻥 걷어차는 쟤는 도대체 커서 뭐가 되겠노. 큰 구렁이가 담을 넘어 오더라는 외할아버지의 태몽에다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꽤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니 우리 아빠.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내 딸은 아무래도 큰 물에서 놀려나 보다!
큰 물에서 놀 거라던 딸은 97년을 강타한 IMF로 기울어진 집과 몇 번의 이사를 거쳐 작고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큰 물에는 나왔다. 경쟁의 끝판 왕, 대한민국 사회라는 큰 물. 아빠 예상을 빗나간 건 노는 큰 물에서 딸은 일한다는 사실. 사람 대하는 거 너무 싫다면서 알바도 직장도 사람을 제일 많이 대하는 직종만 골라 갔던 나는 사회생활 앞에 기꺼이 싸가지 없음도 내려놓고 자존심도 내려놓는다.
상대방이 반말을 해도 나는 늘 존댓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기본 옵션. 할 말은 하는 대신 속에 집어넣고 참는 인내를 발휘한다. 경력이 쌓여도 월 200도 안 되는 월급으로 전전긍긍하고, 진상의 전화에 회사 화장실에서 울고, 점심시간에도 전화받으라고 무선전화기를 도시락 옆에 놓는 사장 밑에서 일하는 불쌍한 어른이 될 줄 몰랐다. 사실은, 회사원이 될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해봤다. 당연히 스물아홉쯤에는 상담심리사로 커리어를 쌓고, 작가가 되어 글을 쓸 줄 알았지.
카페에서 친구와 회사 욕 하면서 퇴사를 외치고, 늦게 가면 내일 출근이 피곤하니까 일찍 가자는 모순된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직서를 사무실 컴퓨터 안에 넣어놓고 월급날을 기다린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고 찌질함도 이런 찌질함이 없다.
어른이 이런 거라면 천방지축 자신만만하게 할 말 하던 어린이 시절이 그립다. 이제는 진짜 어른이 된 건지 입을 열기보다 닫는 편이 더 편하고,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는 게 좋다. 아이돌을 보면 멋있기보다 귀엽고, 아이돌의 귀여움보다 재테크 정보 찾는 게 더 재밌다. 회사 탈출을 외치면서 오늘도 출근해서 점심시간에 펀드 수익률을 확인한다.
아, 이 별 것 없는 인간아. 글이라도 좀 열심히 쓰지 그랬니. (열심히로 모든 게 되는 건 아니더라만) 그래도 응원해준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는 찌질하고 별 것 없는 나,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