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아지트 Nov 29. 2023

나만의 '베이지'를 찾아 나설 시기, 중년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아직 노랗게 변하지도 못한 채 은행잎들이 땅에 떨어진다.  ‘저 아이들도 노랗게 제 빛을 마음껏 뽐내고 싶었을텐데...’ 싶은 마음이 든다. 여름이 너무 뜨거워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가을 옷은 건너뛰고 겨울준비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네가 얼마나 찬란하게 노란빛 일수 있는지 알고 있단다...’라고 말해준다. 시간에 등떠밀려 조숙해져야하는 그들에게서  지난 세월이 겹쳐보인다.




23살에 아줌마가 되고 25살에 애엄마가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기정체성을 찾는 사춘기조차 제대로 겪지 못한 채로, 정신없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시간표를 따라 내 삶이 결정되었다. ‘계절’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열심히만 살았다. 그러다 멈춰서 보니 파릇파릇한 ‘봄’, 싱싱한 ‘여름’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어느 덧 ‘가을’이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꽁꽁 얼어버리는 겨울이 닥칠테지...갑자기 들이닥친 겨울비에 등떠밀려 '연두빛'인채로 땅에 떨어진 은행잎처럼 아쉽게 땅에 떨어져 버리겠지... 그땐 빠른 세월을 원망하겠지...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겠지...


그러나 다행히나의 계절은 아직 ‘가을’...아직 '겨울’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나만의 ‘찬란한 빛’으로 물들수 있는 계절이어서 다행이다!


블랙 vs. 베이지     


블랙은 나의 보호색같았다. 엄마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보호색을 입어야 했다. 외동딸에게 분홍분홍한 공주옷 입혀서 키우고 싶으셨던 엄마는 그런 색이 안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다. ‘짙은 색을 입혀놓으면 그나마 나은데, 밝은 색이 와이레 안 어울리노?!’ 하셨다. 엄마에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얻어내려면 블랙을 입어야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색 옷을 입고 나가려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안 울린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면 그때부터 옷이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결국은 고민 끝에 블랙으로 갈아 입은 후에야 마음 편히 외출을 하게 된다.      


30대에 색상 심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강사가 나의 퍼스널 칼라가 블랙이라고 해주어 그때부터 블랙은 나의 패션세계에서 ‘정답’이 되었다. 옷장 가득 블랙이다. 어제와 다른 옷을 입었는데 아무도 그 변화를 모를 만큼 늘 블랙이었다. 온 몸에 블랙으로 문신된 사람이었다. 점점 더 블랙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블랙이 나에게 힘을 주는 것일까, 익숙함이 자신감이 된 것일까... 블랙을 입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당당해보인다’ ‘세련되어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만큼 블랙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 들을 때까지 블랙만 한번 입어볼까'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블랙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블랙을 입으면 얼굴빛이 칙칙해보이는 것같아 입기가 싫어졌다.  젊은 시절, 블랙만 고집하는 나에게 어떤 분이 '그래...젊으니까 블랙이 어울리지...늙어봐라...'하셨던 기억이 났다. 나도 어느덧 블랙이 안어울리는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옷을 사러가도 블랙 보다 베이지, 아이보리, 연회색, 연보라로 눈길이 간다. 그 중 특히 베이지를 입으면 괜히 행복해진다. 블랙을 입을 때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편안함을 느낀다. 블랙은 나를 당당하게 보이게 하고 나에게 힘을 주는 색이라면, 베이지는 나를 부드럽게 보이게 하고 나에게 따스함을 주는 색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블랙’이라는 정답을 벗어난 여유로움까지 더해진다. 중년의 나이에는 ‘당당하고 세련된 여자’라는 소리보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여자’이고 싶은 것일까... 중년기 이전에는 자존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블랙’이 필요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젠 좀 자유롭고 싶다. '정답'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색이 많은데, 블랙과 동일시되어 살다 갈 뻔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잘 묻혀있다가 조용히 사라질 뻔 했다. ‘나’로 살기보다, 외부적으로 안전하게 평가되는 모습으로만 살다 갈 뻔 했다.     

 

이제라도 나만의 색을 찾아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게 평가받는 색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색을 만나서 다행이다. 더 이상 내 마음 안에서 ‘안 어울린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한동안 베이지에 푹 빠져있겠지...가끔은 블랙에 베이지를 섞어 입겠지...그러다 또 어느날은 다른 색에 꽂히겠지...


나는 화려한 단풍처럼 알록달록 여러 가지 빛으로 빛나보고 싶다.  아직 남은 이 '가을'을 찬란하게 보내보고 싶다. 지금은 '베이지'를 만나서  좋다. 남은 중년기동안 또다른 나의 색을 만날 기대가 있어서 좋다.


'나의 색'을 찾아 즐겁게 누려볼수있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