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예전에 봤던 ‘작은 아씨들’이라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여주인공은,갑자기 엄청난 돈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비싼 코트를 사러 간다. 그때 그녀는 ‘겨울옷 입을 때 가난을 가장 크게느껴요’라고 했었다.
드라마 여주인공에게 '부자'란 '비싼 겨울코트를 살 수 있는 자'였던 모양이다.'부자'에 대한 나의 개념도 비슷하다. 언젠가는 물건을 살 때 '얼마인지'를 묻지않고, '마음에 드는지'만 물어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나이가 들면서 겨울이 점점 두려워진다.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인데, 겨울옷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몸이 너무 약하다. 얇은 옷을 여러겹 입고 나가면 너무 갑갑하다.
작년에 샀던 패딩을 입고 나갔다 오면 온 삭신이 쑤신다. 무거워서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보온성이 떨어져서 온 몸을 오그리고 다녀서 쑤시는 것 같기도 하다. 작년에 구입할 때는 나름 유행에 맞는 디자인에, 겉감은 방풍소재, 속에는 거위털, 모자엔 여우털까지 달렸는데 가격이 착했다. 그런데 일년만에 꺼낸 패딩은 거위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트렌치코트 정도의 두께로 변해있었고 무게는 작년보다 무거워져 있다. 당장 내일 영하15도라고 하는데 어쩌지...하면서 백화점에 달려간다. 이번엔 조금 비싸더라도 품질이 보증되는 브랜드 제품으로 사야겠다 싶었다. 작년에 올케가 새로산 패딩이 뜨듯하다고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큰 마음 먹고 겨울패딩으로 유명하다는 몽*** 매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헉... 패딩이 3~4백만원 정도다. 그런데 돈을 들고 갔다 해도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이미 9월에 매진이 되었다고 한다. 비싸도 그정도 일 줄은 몰랐던 나는 ‘아무리 큰 마음을 먹었지만, 패딩이 그런 가격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매장을 나왔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했던 말이 이 말이었구나...’
부자들의 겨울
백화점에 간 김에 결혼예물로 받은 시계에 배터리를 교체하러 불** 매장에 갔다. 직원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내 뒤에서 한 남자가 목걸이를 고르고 있다. 60세 가량의 남성이었다. 목걸이 하나를 고르더니, ‘이것이 이번 해에 나온 디자인인가요?’라고 묻는다. 아내가 최신 디자인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여직원은 ‘디자인은 작년에 나온 것인데, 다이아몬드가 아닌 루비가 붙은 모델은 올 겨울 신상입니다’ ‘가격은 350만원입니다’. 등너머로 살짝 보았지만, 그냥 자개로 만든 평범한 목걸이였다. 다이아몬드도 안 붙어있는데 그런 가격일 줄은 몰랐다. 남자도 나처럼 가격에 놀라서, 조금 전의 나처럼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매장을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자는 ‘그럼 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패딩은 숨이 다 죽어있었고, 사실 아주 평범한 아저씨 차림이었다. 그런데 매장에 들어와 단번에 마음에 드는 모델을 찾고, 주문하고 물건을 가져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세련된 태도를 볼 때, 여러번 이 일을 해 본 솜씨였다. 그에게 350만원으로 사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새 패딩이 아니라 아내의 목걸이었다는 것이 감동이다. ‘어쩌면 해마다 크리스마스에 아내를 위해 목걸이를 선물 했으려나...’하며 그 선물을 받게 될 그 남자의 아내를 상상해본다.
‘부자’는 아무나 하나...
‘어머...고마와요!’라고 웃어줄 그 남자의 아내가 부러운 것은 가격을 물어보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남편이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아마 ‘이거 얼마짜리야? 350만원이라고? 35만원도 아니고?! 차라리 돈으로 주지...’라고 했을 것 같다.
대학 선배 중 한분은 은퇴후 겨울마다 3개월씩 필리핀에 가서 살다가 온단다. 나도 십년후에는 그런 ‘부자’이고 싶었다. 돈을 쥐어준다고 해도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결국 나는 40% 세일을 하는 아웃도어 브랜드 패딩을 하나 사입고 백화점을 나왔다. 350만원짜리 패딩이었다면 눈 내릴 때 ‘앗, 패딩 젖을텐데...’이라고 걱정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정도 가격이라면 눈 내릴 때 ‘우와~ 눈이다~~’하며 반길 수 있을 것 같다. 눈에 패딩이 더러워지면 ‘내년에 또 사지 뭐...’ 몽*** 하나 사는 돈으로 향후 10년간 매해 패딩사도 되는 여유를 얻었다. 매해 새로운 패딩을 살 수 있는 플렉스...그 여유를 돈으로 샀다. '신포도 기제'의 발동인가...